2002년 1월호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러시아측 자료로 본 명성황후 시해사건

  • 박종효·전 모스크바대 교수

    입력2004-11-09 15: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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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 내의 복도)을 따라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해 갔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학계의 꾸준한 노력으로 대부분 밝혀졌지만 사건 당일의 자세한 진상은 미궁에 빠진 채 여러 주장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동안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연구는 미·소 냉전의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측 자료는 도외시된 반면, 국내자료와 영·미 자료 그리고 은폐조작된 일본측 자료에 의존해왔다. 최근에는 시간설(屍姦說)과 황후 시신을 일본인이 궁정 밖으로 빼돌렸다는 충격적인 주장도 나오고 있다

    과연 지금까지의 여러 주장들이 얼마만큼 진실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문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러시아 외무성 제정(帝政)러시아 대외정책문서국 자료와는 다소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러시아측이 보관하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문서는 당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Вебер К И )가 외상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Лобаов-Ростобский А)에게 보낸 보고서 그리고 당시 고종을 위시한 여러 목격자의 증언서 등이다.

    서방국가의 자료에서도 베베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서울주재 외교 대표단의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항의하여 마침내 일본공사가 조선의 국모(國母)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관련해 러시아 외상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전 농상공부 대신 이범진(李範晋)이 10월8일 이른 아침에 러시아공사관으로 찾아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민왕후(1897년 이전에는 왕후로 호칭)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말했다.

    그때 마침 궁궐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하고 우리 공사관으로 온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도 일본 폭도들이 왕후를 위해(危害)하려 한다고 증언했다. 나는 조선 국왕의 절박한 구원 요청에 조선과 이해관계가 많은 미국의 앨런(Allen) 공사대리와 동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즉시 앨런에게 연락, 그와 함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일본공사관을 방문했다. 그러나 미우라 공사가 출타중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궁궐로 가서 고종을 알현했는데 벌써 일본공사 미우라와 대원군(大院君)이 와 있었다.

    오후에 일본공사를 만나 일본군이 조선궁궐에 난입한 진상을 듣기로 하였다. 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사건과 무관함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베베르는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일 즉시 러시아 외상에게 숫자로 된 난수표 암호전문을 보내고, 다음날 10월9일에는 현장 목격자로부터 증언서를 받아 보고서에 첨부해 함께 외상에게 보냈다. 러시아 외상은 베베르의 보고서를 사건 목격자 증언서와 함께 니콜라이 II세 황제에게 상주(上奏)하였다.

    니콜라이 II세(당시 그는 대관식 이전이었으나 황제 직무수행)는 베베르 보고서를 읽고 상단에 친필로 “천인공노할 사건이니 좀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급기야 일본의 만행을 경계해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두만강 국경과 인접해 있는 러시아극동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에게 산하 부대를 비상대기시키라고 명령했다.

    베베르의 민첩한 활동

    이와 같은 베베르 보고문서와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서 등이 현재 러시아 외무성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국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그 문서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

    ▲고종의 증언서(1897년 대한제국선포 이후에 고종은 황제로 호칭. 민왕후도 이후부터 명성황후로 추존) ▲시해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의 증언서 ▲전 농상공부 대신 이범진(李範晋) 증언서 ▲조선군 부령(副領, 중령) 이학균(李學均) 증언서 ▲조선군 정령(正領, 대령) 현흥택(玄興澤) 증언서 ▲러시아인 궁궐 경비원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서 ▲가톨릭 서울주교 프랑스인 구스타프 뮤텔(Gustave Mutel)의 증언서 ▲10월8일 서울 일본공사관에서 서울주재 서방 외교대표(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가 모여서 미우라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며 나눈 대담록(영국 총영사가 기록) ▲조선 외부대신(外部大臣) 성명서 ▲서울에서 일본인이 발행한 한성신보(漢城新報) 기사 ▲일본군 궁궐 침입로 도면(圖面)

    그밖에 베베르가 10월 9일 이후에 외상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에게 보낸 문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고종의 서명 없이 일본이 강압적으로 발표한 왕후폐위칙서(王后廢位勅書) ▲대원군의 성명서 ▲10월25일자, 11월5일자, 11월13일자 일본공사관에서 서울 외교대표들이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며 나눈 대담록 ▲베베르의 보고서와 전문(電文) ▲동경주재 러시아공사 히트로보의 전문 ▲중국에서 보낸 세레딘-사바틴의 2차보고서(사건 당일 밤 궁궐의 서양인 경비원으로 미국인 다이(W.M. Dye)와 함께 있었던 세레딘-사바틴이 서울 공사관에서 다 쓸 수 없었던 내용을 중국지부 러시아영사관에서 러시아 외무성에 2차 보고한 증언서 ▲고종에게 보낸 일본천황의 친서 등이다.

    우선 위와 같은 증언서를 포함해서 자세한 사건보고서를 러시아 외무성에 제출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베베르는 1841년 7월5일 러시아 리바프 지방에서 독일계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 선교사였으며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는 1865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 동양학부를 졸업한 후 러시아 외무성 외교관 시보로 채용되어 베이징(北京)에서 5년간 중국어 공부를 계속했다. 그후 중국 톈진(天津)주재 영사, 일본주재 총영사, 베이징주재 임시공사대리를 역임하고, 1885년에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그는 동양의 예절에 밝아 고종의 환심을 사게 되었으며 처(妻)언니인 독일인 존딱에게 서울에 ‘손탁(러시아어로는 ‘존딱’)호텔’을 경영하도록 했다. 존딱은 이렇게 민왕후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베베르

    베베르는 조·러 수교 조약체결을 비롯해 고종이 친러책을 펴도록 한 러시아의 매우 유능한 외교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후에 베베르는 고종황제로부터 황실가족에게 수여하는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으로서는 최고 훈장인 충무훈장(忠武勳章)을 받기도 했다.

    그는 민왕후 시해사건 때 관련 목격자들의 증언서를 사건 당일에 받는 민첩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일본공사와 일본정부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다른 서울주재 외교 대표들의 선두에서 일본의 만행을 밝혀내고 범인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범진(李範晋)은 그의 증언서에서 당일 밤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군대와 조선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고종은 나에게 시간을다투어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는 어명(御命)을 내리셨다. 나는 서쪽 담으로 기어올라가 밖을 보았더니, 정원은 군인들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남쪽에 있는 광화문(光化門) 쪽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동남쪽 담의 구석에 있는 작은 탑에 올라가보았다. 그곳에도 밖에는 2명의 일본군인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순찰병이 좀 멀리 간 틈을 타 약 4~5m 높이에서 밑으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했다. 미국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

    고종이 이범진을 러시아공사관에 앞서 미국공사관으로 보낸 것은 당시 조선에는 궁내부 고문(宮內府 顧問)으로 미국인 레젠드르(C.W. Legendre) 장군, 군사교관으로 다이(W.M. Dye) 장군(퇴역 대령 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150여 명이나 활동하고 있었고, 미국공사관에서 앨런(중국과 조선에서 의료선교사로 근무한 후 서울 미국공사관에 채용되었다)이 왕실에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고종은 위급한 상황에서 제일의 구원자로 미국공사관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이범진은 아무튼 미국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다고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궁궐 포위 앞뒤로 발생한 사건은 러시아인 세레딘-사바틴이 증언하고 있다.

    세레딘-사바틴(당시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고종에게 일본은 유럽을 두려워한다면서 유럽인 경비원을 여러 명 궁궐에 채용하도록 건의했다. 세레딘은 그중 한명이다)은 서울 러시아공사관에서 쓴 증언서에서 사전 사건모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전날 밤인 6일 밤 12시경 경복궁을 순시하고 있을 때 광화문쪽이 소란스러웠다. 광화문 앞에 조선군의 무리가 보였고, 그 뒤에 일본군 부대가 정렬해 있었다. 조선군은 7일 새벽 2시까지 큰소리로 떠들다가 조용해졌다. 궁궐 별군관(당직 사령)의 설명으로는 며칠 전 조선군 훈련대가 경찰대와 싸웠기 때문에 이 두 부대를 해산시킨다는 소문이 돌아 훈련대가 궁궐 앞에 모여 청원시위를 벌였으나 일본군 부대가 도착해 해산시켰다고 했다.

    아침에 퇴근해 집에 있으니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한 중국인이 찾아와 밤에 궁궐에 불상사가 발생할 것이라고 은밀히 경고했다. 그러나 그 말을 흘려듣고 저녁 7시에 궁궐로 가는데 길에서 우연히 그 중국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나가지 말라고 만류하며 밤에는 절대로 궁궐에 있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중국인은 조선군이 오늘 밤 음모를 꾸며 궁궐을 기습할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궁궐에는 폭동의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궁궐 돌담 옆과 길에는 전과 다름없이 초병(哨兵)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날 밤 유럽인 경비원 당직으로는 미국인 다이 장군과 나 세레딘-사바틴이 있었다.”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을 보면 사건 전날밤에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이 대궐 앞에 모여 궁궐침입 예행연습을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당일 밤에는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도 중국인으로부터 사전에 입수했다. 그런데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대궐이 포위되는 지경에 이른다.

    대궐 포위에 대한 상황 설명은 현흥택 궁궐경비대 정령과 세레딘-사바틴 그리고 이학균 부령의 증언서에서 드러나고 있다. 먼저 현흥택 정령은 증언서에서 경복궁 포위 시각을 말하고 있다.

    “8일 새벽 2시 별군관(궁궐경비 당직 사령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즉시 궁궐 경비병 수명을 광화문으로 급파해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돌아와서 고종의 호위경관 말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시간이 지나 새벽 4시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春生門,경복궁 동북문)과 추성문(秋成門,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

    이 증언은 이미 밤 2시부터 경복궁 주위에 폭도들이 집결하여 궁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경복궁 포위 시간과 관련해 세레딘-사바틴도 폭도들의 광화문 최초 집합 시각만 모르고 있을 뿐 춘생문과 추성문 포위 시간대는 현흥택 정령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갑자기 8일 새벽 4시에 궁궐경비대 이학균 부령(당시 궁정경비대 소속으로 다이 장군의 수석통역관)이 유럽인 궁궐경비원 숙소에 뛰어와 다급한 목소리로 일본군과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이 경복궁을 포위했다고 말하였다.”

    이 증언은 현흥택 정령이 앞서 말한 8일 새벽 4시에 동·서쪽 양 북문을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포위했다는 시간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유럽인 궁궐경비원은 이날 새벽 2시부터 폭도들이 궁궐 주위에 집결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럽인 경비원은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이학균 부령을 통해서 겨우 4시경에야 알게 되었다.

    세레딘-사바틴은 궁궐 포위에 관한 증언을 계속하고 있다.

    “다이 장군과 나는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실로 갔다. 그러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 4시 반경에 다이 장군은 추성문 쪽으로 가서 그곳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이학균 부령을 불러 동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고종을 알현해 보고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왕실내궁 쪽으로 갔다.

    궁궐내 상황

    다이 장군과 나, 둘이서 추성문에 다가가자 대문틈으로 번쩍이는 총검을 착용한 일본군 병사 40~50명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달빛에 환히 보였다. 일본군은 곧 우리의 순찰을 눈치채고 담쪽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다음엔 춘생문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쪽에도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한 조선 사람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달라고 몇 번 외쳤다.”

    고종 알현

    이때의 궁궐 상황은 이학균 부령의 증언서에서 잘 나타난다. 대궐이 포위된 긴박한 상황에서 고종에게 달려간 이학균 부령은 일본인 폭도들의 궁궐포위 시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8일 새벽 3시경(앞서 현흥택 정령은 광화문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출현시간을 2시로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동북쪽 춘생문에 집결한 시간을 말하고 있다) 경복궁 동북쪽 춘생문에 사복을 입은 일본인 수명과 그 뒤에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 200여 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지휘를 받으며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훈련대 대장 홍계훈 정령(1882년 임오군란 때도 왕후를 구출하였으며, 이날 밤에 전사했다)이 춘생문으로 급히 가서 그들에게 왜 이곳에 훈련대가 집합해 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자, 홍계훈 정령은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은 우리의 상관이 아니고 일본인 교관이 상관이니 참견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홍계훈 정령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담 저쪽에 서있는 나를 불러 춘생문 앞에 일본인들과 일본인 교관이 인솔한 훈련대가 집합해 있으나, 이런 늦은 밤에 소집된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해산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홍계훈 정령과 나는 궁궐상황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광화문쪽 경비초소로 가서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이때 경비병이 뛰어와 보고하기를 일본군 폭도 60여 명이 서쪽 담으로 침입하고 있으며, 그중 30명은 군복을 착용하고 나머지는 사복을 입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부관(副官)에게 확인하라고 지시했더니 부관이 들어와 기왓장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고했다.

    4시 반경이었다. 나는 북쪽 작은 문(왕가가 거처하는 궁으로 들어가는 문)에 서서 유난히 밝은 달빛에 망원경으로 추성문 쪽에서 움직이는 약 12명의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즉시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위 증언서와는 달리 이학균 부령은 고종에게 급보(急報)를 하러 가는 길에 먼저 유럽인 경비원 숙소에 들러 다이 장군과 세레딘-사바틴에게 상황을 알리고 다음에 고종을 알현했다.

    이학균 부령이 왕가에 도착했을 때는 고종이 벌써 외국인 접견실과 회랑으로 연결된 별채에 앉아계셨다. 그리고 주위에는 경호원이 분주히 내왕하며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다.

    “이학균:왕후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고종: 왕후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니 염려 말고 안심하라. 그리고 경비병은 유혈사태를 예방할 모든 대책을 강구하라. 짐은 이미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이상의 대담으로 미루어보아 고종은 이미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민왕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어떤 피신처에 은신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궁궐 난입

    세레딘-사바틴은 당시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새벽 5시경에 춘생문에서 조선군 무리의 큰 구호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사전에 행동을 모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분 후에 추성문 쪽에서 총성이 들리고, 잠시 후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 던져버리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추성문 쪽의 총성을 신호로 춘생문 쪽에서도 일본인 폭도들과 조선군 훈련대가 난입하기 시작했으며 광화문에서는 일본인폭도 5~6명이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었다. 이들은 경비병에게 몇 발의 총을 발사해 궁궐경비병을 도주시키고, 일본인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가 궁궐 안으로 쳐들어오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당시 경복궁 출입문은 여러 개가 있었으나 이날 밤에 폭도들은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은 경복궁 외곽 출입문으로 일본 폭도들이 난입한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왕가 내궁(內宮)의 방어와 관련해서 세레딘-사바틴이 다시 증언하고 있다.

    “궁궐경비병은 총인원 1500명에 장교가 40명이었으나 5시10분경에 남아 있는 사병은 250~300명뿐이었다. 다이 장군은 제1방어선인 경복궁 외곽 문에서 후퇴해 남은 경비병을 겨우 집합시켜 제2방어선으로 북쪽 왕가의 출입문에 배치했다. 경비병은 왼쪽 길에 서서 방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춘생문으로 난입한 일본인 폭도와 조선군 훈련대가 왕가로 출입하는 북쪽 작은문(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춘생문에서 가까운 문) 틈으로 경비병을 향해 한번에 30~40발씩 3번 집중사격을 했다. 폭도들은 많은 경비병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없는 듯 머리 위로 높이 총을 발사했다.

    다이 장군과 나도 추성문을 통해 난입한 폭도들이 발사하는 총의 사격권 내에 들어 있었으나 나는 오른쪽 문(3개중 중간문), 다이 장군은 왼쪽의 신무문(神武門,추성문에서 가까운 문)의 담벽에 몸을 숨겨 무사했다.

    다만 내 앞에서 궁궐경비병 한 사람이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남아 있던 궁궐경비병들은 난입자들이 첫 집중사격을 한 뒤, 한 발도 응사하지 않고 총과 군복상의를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다.”

    이때의 상황을 이학균 부령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동북쪽 춘생문으로 침입한 일본인과 조선군 훈련대는 내가 안에 있는 북쪽 작은문까지 왔다. 문이 잠겨있는 것을 보고 일본인 폭도 몇 명이 담에 기어올라가 담 위에서 밑에 있는 궁궐경비병을 향해 발사하는 총성이 한밤의 적막을 찢고 울리자 경비병들은 다 도망쳐 버렸다. 그러자 수명의 일본인 폭도들이 월담하여 대문 앞에 대기하고 섰던 일당에게 문을 열어주어 폭도들은 왕가의 내궁 북쪽을 점령했다.

    5~6명의 사복을 입은 일본인은 칼로 무장하고 고종과 그 가족이 거처하는 곤령합(坤寧閤)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몇 몇 남은 부하 병사들과 함께 이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일본인 폭도들에게 달려가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떠밀어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학균 부령도 궁궐수비대가 무력하게 폭도들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총성에 놀라 도주한 사실을 자인했다.

    춘생문 쪽에서 침입한 폭도들은 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작은 문을, 추성문 쪽의 난입자들은 다이 장군과 세레딘-사바틴이 지키고 있던 대문 수비를 거의 같은 시간에 무너뜨렸다. 최후의 제2 방위선이 무너진 것이다.

    세레딘-사바틴은 추성문쪽의 침입 상황을 중국 지부 러시아공관에서 쓴 증언서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난입자들은 추성문에서 두 방향으로 밀어닥쳤다. 한 무리는 다이 장군이 지키고 있는 문쪽으로 가고, 또 다른 무리는 내가 서있는 문으로 달려들었다. 폭도들은 다이 장군을 붙잡고 유럽인 경비원 숙소쪽으로 갔으며, 나를 잡은 일단의 폭도는 왕의 침전이 있는 곤령합과 왕후의 침전인 옥호루 쪽의 담 안으로 들어섰다. 막 유럽풍의 양옥(외국인 접견실)을 지날 무렵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별안간 총소리를 듣고 놀란 환관(宦官), 벼슬아치, 궁노(宮奴), 폭도 등 3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일시에 뒤로 밀어닥쳤다. 60~70보 가량 떠밀려가다가 왕가에까지(곤령합과 옥호루는 별채였으나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진입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목재로 건축한 어떤 작은 별채에 부딪쳤다. 나는 무리와 함께 밀려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판자에 매달렸다. 떼를 지어 밀려오던 환관과 벼슬아치, 궁노들은 내 곁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나만 혼자 그곳에 남게 되어 왕후의 처소에서 벌어진 만행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복을 입은 일본인 폭도 5명이 긴 칼을 들고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앞뒤로 뛰어다니고 있었으며 그외에도 일본인 폭도 20~25명이 단검을 들고 있었다. 출입문 2개는 각각 일본군 2명과 장교 1명 등 도합 5명이 차렷자세로 서서 지키고 있었다.

    조선군 훈련대 소대는 왕후의 침전 옥호루를 약간 등진 채 세워총자세로 정렬해 있었다. 이 소대 옆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양복을 잘 입은 한 일본인이 유럽식 긴 칼(세레딘-사바틴은 일본도를 유럽식 긴 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을 빼어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이 자가 일본인 폭도들의 지휘자인 듯싶었다. 나는 이 자에게 다가가 영어로 ‘굳 모닝(Good morning)’ 하고 인사했다. 일본인 두목은 대답 대신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영어로 다음 질문을 했다.

    일본인 폭도 두목:성명(姓名)을 말하라.

    세레딘-사바틴:세레딘-사바틴입니다.

    일본인 폭도: 직업은 무엇인가?

    세레딘-사바틴: 건축가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뜻밖에 사람들에게 밀려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의 호소를 듣고 두목은 생명은 보장해 주겠으니 그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내친김에 군인 한두 명을 붙여 호위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왕후 처소 옥호루에 있던 일본말을 잘하는 조선군 두명을 불러 나를 보호해주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게 됐다고 안심하고 왕후침전에서 일본인 폭도들이 자행하는 만행을 자세히 보았다.

    일본인 폭도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왕후의 침전에서 2m가 넘는 창 밖의 뜰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궁녀들은 한 사람도 달아나거나 소리 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혔을 때도 창 밖으로 던져졌을 때도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무서운 고통을 참고 있었다.

    궁녀들은 옥호루에 있었으며, 뜰에 내쳐진 궁녀들은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이런 추측을 한 이유는 내가 조선여성의 고매한 순절(殉節)정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일본인 폭도들은 두 명의 궁녀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와 내가 서있던 곳에서 겨우 5~6보 떨어진 곳에 던지고 갔으나, 궁녀들이 살아서 호흡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버려진 궁녀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혀 노대(露臺) 위에서 뜰로 내던져질 때도 앞서 말한 궁녀들과 똑같이 반항하거나 울부짖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 궁녀는 넘어져 눈을 뜨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칼을 든 일본인 폭도 5명(3명은 사복을, 2명은 양복을 착용하고 있었다)이 붉게 달아오른 흥분한 얼굴로 눈에 살기를 띤 채 야수처럼 왕후 처소 이곳 저곳을 뒤지며 왕후를 찾고 있었다.

    이들 무법자 5명은 내가 현장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듯 급히 내게 뛰어와 일본어와 조선어로 내가 누구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가를 물었다.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하고 있던 두 명의 조선군이 설명하자 그들은 다시 왕후의 침전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섰다.

    이때 외모가 낯익은 조선인이 이곳에 들어와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잘 만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광경을 보고 미친 듯 날뛰던 폭도들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 조선인은 그들에게 나에 대해 중요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이 내게는 가장 두려웠다.

    그들은 분개하여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보호하고 있던 조선군도 물러섰다. 어떤 자는 나의 옷깃을 잡고 어떤 자는 양복과 팔을 잡고 고함치며 위협하면서 왕후가 어디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일본어와 조선어로 물어 나는 전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기색을 지어 보였다. 내 옷을 잡았던 자가 영어로 물었다. ‘왕후는 어디 있냐?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

    이런 순간에 일본인 두목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놓아주고, 두목에게 아주 공손한 태도로 나와 나를 알고 있는 조선인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두목은 그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와서 아주 엄격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아직 왕후를 찾지 못했다. 왕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왕후는 어디 있느냐?

    두목에게 나는 조선의 궁중법도에 따라 왕후를 볼 수도 없으며, 침전도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두목은 나의 이런 말을 이해한 듯했다. 그러나 나를 알고 있는 조선인이 내가 현장에 있는 것이 불안한 듯 일본인 두목에게 내가 틀림없이 왕후의 은신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유일한 유럽인 증인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사정이 급해지자 나는 일본무사(武士)는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킨다는 말을 상기하고 급히 두목에게 쫓아가 약속을 지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마침내 두목은 나를 지키던 2명의 조선군인에게 나를 옥호루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두 명의 조선군인 호위를 받으면서 광화문까지 나오는데, 여러 장소에서 많은 일본군을 보았다. 그리고 특히 한 곳에서는 150여 명의 일본군과 장교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곳에 고종이 계시는 것 같았다. 광화문을 나온 시각은 아침 6시였다. 왕후의 처소에서 광화문까지는 약 10~15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5시50분경까지 내가 왕후의 처소에 있었던 동안 그곳에서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를 찾아내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관(현 경향신문사 옆)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6시30분경이었다. 위급한 궁궐 사태의 현장 목격자로 내가 본 모든 것을 대리공사 베베르에게 증언하였다.”

    중국 지부 러시아공관에서 그가 쓴 증언서에서는 제물포(인천) 외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해군함정 2척 중 1척이 10월10일 밤 제물포에서 사복을 입은 일본인들과 군인을 태운 뒤 몰래 일본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밖에도 10월9일 저녁으로 예정된 일본행 정기여객선이 9일 새벽, 예고 없이 제물포에서 일본인 승객들을 태우고 떠났다는 증언도 했다.

    (세라딘-사바틴은 제물포에서도 한때 거주했으며, 독립문을 비롯한 러시아공사관과 정교회 등을 설계했다. 그리고 러시아 동청철도(東淸鐵道) 여객선 제물포 지사장을 역임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월9일에는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친일 내각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명성황후의 최후

    세레딘-사바틴이 옥호루에서 떠난 이후 상황은 한 무명 상궁(尙宮)이 증언하고 있다.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은 명성황후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하였다.

    “일본 폭도들은 왕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쪽으로 왔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이 일본 폭도들에게 왕후가 있는 방 앞에서 양팔을 들어 가로막고 궁녀들뿐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 순간 일본인 폭도들은 칼로 이경직 대신의 양팔을 내리쳐 그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이경직은 이날 밤 사망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괴성을 지르며 방에 난입해 왕비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왕후와 궁녀들은 왕후가 이곳에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내의 복도)을 따라 급히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잡고 마룻바닥에 넘어뜨린 후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후 얼마 지나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運柩)해 갔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궁궐의 한 환관(宦官)을 통해서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시신을 화장(火葬)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위의 무명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침전에 난입했을 때, 왕후도 처음에 궁녀들과 같이 왕후는 이곳에 계시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왕후는 갑자기 복도를 따라 결사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이 때문에 폭도들은 왕후로 짐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앞서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폭도들은 이곳에서 궁녀들을 하나씩 밖으로 내던지며 극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폭도들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탈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신을 운구하여 화장했다는 말은 현흥택 정령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현흥택 정령은 진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은신처를 말하라고 사정없이 나를 때렸으나, 끝내 모른다고 했다. 폭도들은 고종이 계시는 곤령합으로 나를 끌고가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했다. 모른다고 하자 폭도들은 각감청(閣監廳)으로 다시 나를 끌고가서 왕후가 계신 곳을 자백하라고 또 때렸다. 이때 갑자기 곤령합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나를 잡고 있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으로 급히 뛰어갔다. 그후부터 일본인 폭도들은 더 이상 왕후의 피신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곤령합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 그리로 가보았다.

    고종은 장안당(長安堂)으로 벌써 옮겨가셨고, 곤령합에는 왕후가 피살된 채로 누워 계셨다. 나는 주위에 일본인 폭도들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서 나왔다. 그후 왕후의 시신을 동쪽 정원에서 화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화장장에 있는 시신의 의복이 여자옷인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이처럼 현흥택 정령은 왕후의 시신을 왕의 침전인 곤령합에서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왕후의 시해시점은 세레신-사바틴이 약 20~30분간 옥호루 현장에 머물러 있다가 떠난 시간인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누가 왕후를 시해했는가는 고종의 증언서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 칙서는 고종이 국내부 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레젠드르의 통역관을 통해 발표한 것이다.

    “짐(朕)의 면전에서 전 조선군부 고문 일본인 오카모토 그리고 스즈키, 와타나베가 군도를 들고 침전(寢殿)에 난입해, 오카모토와 스즈키가 왕후를 잡아 넘어뜨리고….”

    여기서 고종은 실신해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다음에 왕세자의 말로는 왕후가 밖으로 피해나가자 오카모토와 스즈키가 왕후의 뒤를 쫓아갔다고 말했으나 아마도 피신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종은 후에 와타나베가 칼을 들고 왕후의 뒤를 쫓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것이 고종이 레젠드르의 통역관을 시켜 발표한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한 증언의 전부다. 지금까지가 사건 관련자들의 증언서를 토대로 본 명성황후 시해 당일 밤에 벌어진 광경이다. 남은 증언서는 왕후 시해사건의 보충적인 자료 혹은 해명서다.

    고종은 사건 이전에 왕후의 신변을 염려해 서양인 궁궐경비원까지 고용했다. 그런데 러시아 경비원 세레딘-사바틴은 폭동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받고도 방어대책을 건의하거나 세우지 않고 경비원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시해 당일 밤 궁궐경비대는 새벽 2시에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하다가 4시30분경에야 고종에게 급보를 전했다. 고종은 왕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것이다.

    아마도 고종은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왕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왕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도한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유린하고 말았다.

    봉건 군주국가에서 마땅히 조선군은 왕실 수호와 국토방위에 헌신해야 했다. 그런데도 조선군 훈련대 일부는 일본 폭도들의 역모에 가담해 그들의 졸개로 궁궐 침입에 가세했다. 연약한 조선 궁녀들은 일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00명의 궁궐경비병은 겁을 먹고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던지고 도주해버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민족사의 수치인 국모시해(國母弑害)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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