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암도 코미디요, 이길 수는 없어도 즐길 수는 있거든”

폐암투병 이주일의 심경고백 3시간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입력2004-11-09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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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 3학년 때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온 소년. 얼굴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수모를 당했던 무명배우. ‘실수’로 2주일만에 떠서 20년째 ‘코미디황제’로 살아온 풍운아. 그는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오는 암세포조차 코미디로 해석했다.
    ‘당신이 병원에 입원하던 날, 텅빈 방에 앉아 당신 사진을 보았소. 그토록 건강한 당신이… 정말 미안해 여보 미안해…’

    ‘코미디황제’ 이주일(62·본명 정주일)씨가 1988년 12월에 취입한 ‘당신’이라는 노래가사의 한 구절이다. 당시 이씨는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 제화자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이 노래를 불렀다. 주변에서는 ‘나이 쉰이 넘어서 무슨 가수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이씨는 기어코 아내에게 ‘당신’을 바쳤다.

    그로부터 13년. 이주일씨는 ‘당신’의 주인공처럼 병마와 싸우고 있다. 이번엔 아내가 남편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제씨는 남편의 휴식을 위해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경기도 분당의 이주일씨 전원주택은 평일에도 손님이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주일씨가 폐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낮에도 좀처럼 대문이 열리지 않는 곳으로 변했다.

    2001년 11월23일 오전. 이주일씨와 어렵게 전화가 연결됐다. 기침 때문에 이따금씩 말이 끊기기는 했지만 목소리는 비교적 건강하게 느껴졌다.

    ―좀 어떠십니까.



    “그런 대로 지낼 만해요. 괜찮습니다.”

    ―스포츠신문과 여성지에 아프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거 참 이상해. 나는 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 얘기를 기사로 쓸 수 있지? 자기들 멋대로 추측이나 하고….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한번 찾아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언제든지 놀러와요. 할 얘기도 많으니까….”

    23일 오후 6시. 이주일씨 집 앞에 도착했다. 앞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 뒷문도 마찬가지. 마당에서 일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기자를 발견하고는 “외출하셨다. 다음에 찾아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대학병원 엉터리”

    다음날부터는 전화까지 불통이었다. 전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기 위해 아예 플러그를 빼놓은 것. 우여곡절 끝에 26일 오전이 돼서야 이주일씨와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기자가 잘 이해하쇼. 일하시는 분들이 나를 너무 생각하느라 없다고 둘러댄 모양입니다. 오늘 시간이 괜찮으면 놀러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저녁 5시. 집 앞에서 전화를 걸자 대문이 열렸다. 입구에서 안채까지는 100m 이상을 걸어야 한다. 길 옆으로 이주일씨가 정성껏 가꾼 분재와 텃밭이 펼쳐져 있다. 잔디밭 한가운데로 나있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현관문을 열었다. 이주일씨는 소파에 누워 있다가 기자를 맞았다.

    “왜 이제 오는 거요? 아침부터 하루 종일 기다렸잖아. 우리가 얼마 만이지?”

    ―지난해 ‘신동아’에서 축구특집을 할 때 뵙고 처음이니까 1년이 지났습니다.

    “그랬지. 축구 때문에 만났었지…. 한국축구가 잘 돼야 하는데 말이야. 정몽준 회장이 내 말대로 했으면 지금쯤 달라졌을 텐데.”

    이주일씨는 자다가도 축구 얘기만 나오면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다. 2000년에 기자는 ‘축구광 5인이 말하는 한국축구 회생책’이라는 특집기사를 준비하면서 이주일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이주일씨는 무려 2시간이나 열변을 토했다. 다소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그 속에는 한국축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기발한 ‘상상’이 담겨 있었다.

    “내가 축구협회 회장이면, 비싼 돈 들여가며 외국 감독을 불러오지는 않을 거요. 그 돈 있으면 차라리 국가대표팀을 1년 동안 브라질로 보내라 이거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기서 1년 동안 구르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어? 아무리 뛰어난 감독도 한국선수들을 1년 만에 바꿔놓을 수는 없거든. 내가 축구를 해봐서 잘 안다니까.”

    쑥 들어간 눈과 거무튀튀한 얼굴. 첫 눈에 이주일씨의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흡곤란을 막기 위해 코에 끼워넣은 튜브가 무엇보다 안쓰러웠다.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주름살과 아래 얼굴을 덮어버린 수염은 1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악수하면서 만져본 그의 손끝에서 힘이라고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주일씨는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을 말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무심코 던진 안부인사에 쌓였던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여보게 기자 양반, 이 얘기는 꼭 쓰쇼. 우리나라 대학병원 이거 엉터리요. 엉터리도 이런 엉터리가 없어. 내가 7월에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종합진단을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온 거야. 그래서 제주도에 내려가서 낚시하고 골프치고 술 먹고 신나게 놀았지. ‘그러면 그렇지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있겠어’ 하고 그냥 놀아제쳤다니까.”

    갑자기 찾아온 폐암

    이주일씨가 집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제주도다. 1991년 11월 애지중지했던 6대 독자를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뒤 그는 혼자 있고 싶을 때마다 서귀포를 찾았다. 이곳에 두칸 짜리 집까지 마련해두고 동네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적도 있다. 그래서 서귀포에서는 “이주일씨가 제주도로 이사왔다”는 소문이 나돌기까지 했다.

    이주일씨는 서귀포 아래쪽에 있는 지피도라는 섬을 자주 찾았는데, 이곳에 갈 때는 라면 2박스, 소주 1박스 등을 배에 싣고 혼자서 떠났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낚시를 하다가 양식이 떨어지고 사람이 그리워지면 다시 뭍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주일씨는 종합진단에서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자 다시 제주도에 내려가 골프와 낚시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몸이 무거운 거야. 피곤하고 졸리고 아프고…. 살아오면서 이런 일이 없었거든. 다시 검사를 받아볼 생각으로 서울에 올라왔는데, 여느 때 하고는 기분이 다르잖아. 그래서 종환이(박종환 전축구대표팀 감독)한테 전화를 걸었어. 내가 ‘야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고 하니까 종환이가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 가보라고 해. 그랬더니 병원에서 ‘주변정리를 하세요’ 그러는 거야. 내가 화가 나서 ‘의사라면 고쳐보겠다고 해야 정상이 아니냐’고 따지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하는 거야. 이거 참. 대한민국 대학병원이 이래도 되는 거요? 3개월 전에 발견했으면 감기치료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는데, 그걸 몰랐다고 하잖아.”

    그랬다. 이주일씨의 병명은 말기 폐암이었다. 이주일씨는 처음에 술과 담배를 의심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관계 없는 암이었다. 폐암 중에서도 남자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여자들이나 가끔씩 걸리는 아주 특별한 종류였다.

    “하도 답답해서 종환이한테 전화를 걸었어. ‘야 내가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잘못하면 월드컵도 못 보고 갈 것 같구나. 어쩌면 그게 천추의 한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종환이가 내 얘기를 주변 사람들한테 전한 모양이야. 그때부터 사방에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어.”

    이주일씨와 박감독이 만난 것은 1950년대 말 춘천고 시절이다. 두 사람은 당시 여학생들에게 최고 인기였던 축구부의 주전으로 나란히 신흥대(경희대의 전신)에 진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평생친구로 이어준 끈은 다른 데 있었다. 실향민에 가난한 생활, 그리고 술과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호기와 근성….

    이주일씨는 고교시절 자신이 박감독보다 축구실력이 뛰어났다고 회고한다. 박감독이 수비수였을 때 자신은 라이트 윙을 맡았고, 경기를 읽는 눈이나 패스의 정확성에서 한수 앞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축구를 계속했다면, 아마 박감독의 좋은 라이벌이 됐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래가 촉망됐던 이주일씨는 아주 어이없게 축구를 포기하고 말았다.

    “신흥대에 합격하고 자취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고향의 부모님이 보내준 입학금으로 ‘섯다’ 판을 벌인 겁니다. 처음엔 시간 때운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결국 등록금을 모두 날리게 됐죠. 그러고나서 오랫동안 축구를 잊고 살았어요.”

    이주일씨가 축구와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이다. 박종환 감독이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에 오른 것. 당시 이주일씨는 미국 순회공연중이었는데, 때마침 브라질과의 4강전이 LA공연 날짜와 겹쳤다. 천하의 이주일도 이때 만큼은 축구열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주일씨는 ‘친구’ 때문에 공연을 망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국하자마자 박감독을 찾아가 스텔라 승용차를 선물했다.

    이주일씨가 박감독 얘기를 할 때마다 빼놓지 않는 대목이 있다. 바로 이주일씨가 무명배우로 지방을 떠돌던 시절이다. 이씨의 부인 제화자씨는 서울 상계동 단칸방에서 세를 살고 있었는데, 박감독이 제씨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쌀과 미역을 사다준 것. 이주일씨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옛 친구일 뿐, 서로 만날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박감독은 이주일씨가 투병을 시작한 이후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다. 얼마 전 박감독이 여자축구팀을 이끌고 대만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는 국제전화로 친구를 위로했다. 박감독은 대만에서 선수를 훈련시키는 동안에도 각종 암치료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박감독은 이런 말까지 했다.

    “야, 주일아. 내가 잘 아는 친구가 10년 전에 폐암 선고를 받았는데, 이번에 대만에 와서 만났어. 그 친구는 10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서 사업 잘하고 있더라. 그냥 열심히 살다보니까 암도 이겨낼 수 있었대. 그러니까 너도 힘을 내라.”

    이주일씨와 박감독의 우정을 얘기할 때 ‘양념’처럼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전두환 전대통령이다. 이주일씨는 전두환 시대가 만들어낸 ‘코미디황제’지만 그는 5공화국 시절 ‘저질 코미디’ 시비에 휘말려 방송에서 퇴출당한 일도 있었다. 물론 속사정은 이주일씨를 보고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주일은 얼마 뒤 박감독을 통해 전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된다. 박감독이 청와대 잔디밭에서 전대통령의 아들에게 축구를 가르쳐준 일이 있었는데, 이때 박감독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던 것이다.

    ―전대통령께서는 문병을 오셨나요.

    “직접 오지는 않고 비서를 보내왔어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받지 않으니까 대신 사람이 왔더라고.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지.”

    이주일씨의 외아들 창원씨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당시 전대통령은 직접 빈소를 찾아 문상했으며, 장세동 전안기부장 등 측근들까지 문상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 날 저녁 이주일씨와 박감독을 불러 자정이 넘도록 술을 따라주었다. 전대통령은 그때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감은 경험해본 사람만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주일씨는 지금도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

    눈물을 닦고 웃긴 무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에피소드 하나. 이주일씨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사흘 뒤인 11월30일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SBS 개국특집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연예계에서는 이주일씨가 이 자리에서 은퇴 선언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여러분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 하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김영삼씨와 박철언씨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암 환자는 항생제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주일씨도 항생제를 맞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축구얘기를 할 때는 환한 웃음까지 머금었다. 타고난 코미디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참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러가지로 특이한 경우래요. 항생제가 체질에 맞지 않으면 고생이 말도 못하게 심하다는데, 저는 아픈 데가 없어요. 암 중에서도 아주 ‘복 받은’ 암이죠.”

    이주일씨는 마른 기침을 자주 했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가벼운 감기가 왔는데, 약을 먹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주일씨가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인터뷰에 열중하다보니 놓치고 있었던 대형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주일씨가 86서울아시안게임 때 성화를 봉송하는 모습이었다.

    ―빨리 회복하셔서 저 때의 모습으로 돌아오셔야죠.

    “벌써 15년이 지난 일이야. 그때는 축구도 하고 아주 건강했었지. 그런데 말기암이라잖아. 다 틀렸어. 이젠 힘들어.”

    ―희망을 잃지 마세요.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암을 이겨낸 환자들도 많잖아요.

    “그래야죠.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열심히 살아야겠지.”

    이주일씨는 요즘 들어 가족들에게 짜증을 부릴 때가 많다고 했다. 입맛이 없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니까 조금씩 세상살이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주일씨는 “내가 어려울 때 묵묵히 도와준 집사람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마음처럼 잘 안돼요”라고 말했다.

    군대에서 만난 아내

    이주일씨는 군대 시절에 부인 제화자씨를 만났다. 제씨의 오빠가 이주일씨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 한눈에 반한 이주일씨는 적극적인 프로포즈 끝에 상병 시절 결혼식을 올리고 부대 근처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1960년대 초반의 군예대에서나 가능한 소설 같은 얘기였다. 그때부터 20년 가까이 이주일씨가 무명배우로 설움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제씨는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이주일씨의 군대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 한토막. 이주일씨는 노래솜씨와 바보흉내로 사단장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피리의 달인’ 이생강씨가 군예대 신참으로 들어오면서 이주일씨는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자 이주일씨는 날마다 이생강 이등병을 불러 기합을 주었다. 오죽 했으면 뒷날 이생강씨가 “그때는 제대증만 받으면 이주일을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고 털어놓았을까.

    이주일씨는 지난 봄 ‘신동아’ 식구들과 한가지 약속한 게 있다. 조만간 자신이 직접 담근 김장김치로 한 상을 차려서 기자들을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이주일씨는 요리에 조예가 깊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글 뿐 아니라 김치를 담가 장독 20여 개에 나눠 묻어두었다가 겨우내 이웃 노인들에게 나눠준다. 맑은 날이면 장독 뚜껑을 열어 햇빛과 바람을 쏘이는 게 이주일씨의 중요한 일과다. 그는 가난했던 젊은 시절에도 김장독만은 담요에 싸서 단칸방 구석에 ‘보물’처럼 모셔두었다고 한다.

    ―올해는 김장을 얼마나 담그셨어요.

    “내가 몸이 이러니까 집사람에게 조금만 하라고 했더니, 화를 내더라고. ‘당신 몸이 다 낳으면 손님들이 많이 올 테니 더 많이 담가야 한다’는 거야.”

    ―‘신동아’에 실렸던 명태김치를 맛보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게 자연의 맛이거든. 명태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니까. 사람은 원래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가는 거잖아.”

    코미디언들은 이주일씨를 나이에 관계없이 ‘주일이 형’이라고 부른다.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형’이다. 2000년 가을 가수 정수라씨 모친의 회갑잔치 때였다. 커피숍 구석에 앉아 있는 이주일씨 앞에 가수 탤런트 코미디언들이 줄을 서서 인사했다. 호칭은 ‘형’과 ‘오빠’. 이주일씨는 일일이 안부를 물으며 격려했다. 놀라운 것은 후배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빠꼼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다.

    ―코미디언 양종철씨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러게. 나도 그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젊은 놈이 참 안됐어. 그렇게 가버리다니. 사람 사는 거 참 허무하지.”

    ―배일집씨도 사고를 당해서 많이 다쳤다고 합니다.

    “배일집이가? 조심해야지. 목숨이 두 개도 아닌데, 오래 살아야지. 배일집이도 고생 많이 했어.”

    배일집씨는 이주일씨의 후배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배일집씨가 먼저 떴다. 1979년 TBC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서울 명동의 ‘오비스 캐빈’에서 일하던 이주일씨는 MBC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했는데, 방송이 나간 뒤 시청자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너무 못 생겼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담당 PD가 ‘웃으면 복이 와요’팀에서 물러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이주일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코미디 구성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K씨를 찾아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그림을 내밀었다. 일종의 촌지였다. 하지만 이때 K씨는 이주일씨가 가져온 그림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야, 너 뭐하는 새끼야. 이제 갓나온 놈이 이 따위 짓이나 하고 있어. 기본부터 다시 배워. 정신차려 임마.”

    이주일씨는 절망했다. 방송의 문턱이 그렇게 높아 보일 수가 없었다. 이때 이주일씨에게 희망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송해씨다.

    “주일아, 무조건 방송국에 나와.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하다보면 기회가 올 거야. 무조건 버텨보라고.”

    이렇게 해서 이주일은 TBC 코미디언실의 커피 심부름꾼이자 청소부로 들어가 당시 ‘코미디계의 대부’였던 김경태 PD의 눈에 들어 극적으로 방송을 타게 된다. 극장쇼에서 갈고 닦은 이주일 특유의 익살과 오리춤은 순식간에 전국을 강타했고,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로 시작된 유행어 퍼레이드는 암울한 시대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배일집씨는 바로 이 무렵 한창 뜨고 있던 신인이었기 때문에 이주일씨의 감회가 남달랐던 것이다.

    헛된 삶은 아닌가봐요

    이주일씨는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전국의 팬들이 각종 약재와 격려 편지를 보내주고 있는 걸 보면 이주일이 인생도 그렇게 실패한 것 같지는 않아”라고 말했다. 이주일씨는 의사의 처방을 무시한 채 함부로 약재를 복용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대형 냉장고를 구입했다고 한다.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왔어요. ‘기적의 물’부터 암에 좋다는 특효약까지. 눈물겹게 고마운 건 ‘빨리 일어나라. 당신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편지예요. 그 동안 여러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왔는데, 그게 헛된 일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수 하춘화씨는 직접 찾아왔다면서요.

    “그랬지. 하춘화 하고는 보통 인연이 아니거든. 여든 살이 된 아버님과 같이 와서는 한참을 울다 갔어. 그러지 않아도 내년에는 하춘화와 함께 극장쇼 시절을 재현하는 무대를 꾸밀 생각이었는데. 내 몸이 이 꼴이니. 아마도 어려울 것 같애.”

    이주일과 하춘화가 만난 것은 1970년대다. 당시 이주일은 월남(베트남)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떠돌이 MC를 하고 있었던 반면, 하춘화는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얼굴이 못 생겼다’는 이유로 한차례 퇴짜를 맞은 이주일씨는 ‘월급이 없는 조건으로’ 하춘화 공연의 사회자로 전격 발탁됐다. 이 무렵 하춘화의 아버지는 이주일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연예인은 자칫하면 뒤처지고 도태되기 쉽다. 늘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돈은 벌었을 때 아껴야 한다.”

    이주일씨는 이때부터 열심히 돈을 모았다고 한다. 1980년대 일약 스타로 떠오르면서 뭉칫돈을 만질 때도 그는 헤프게 돈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몇 년 동안 줄곧 연예인 납세자 1위를 지킬 수 있었다.

    창밖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이주일씨는 코에 꽂혀 있는 튜브가 답답한 모양이었다. 손가락으로 잠시 호스를 빼더니 “이게 문제요. 다른 데는 다 멀쩡한데…”라고 혼잣말을 하고는 다시 코 안으로 밀어넣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도 1시간여. 이주일씨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짧은 대답 속에 고락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다음주에 다시 만나자”며 현관 앞까지 배웅하는 이주일씨에게 “좀더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중앙일보’를 시작으로 신문과 방송에 이주일씨의 투병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29일 저녁, SBS는 8시뉴스에서 이주일씨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이때부터 이주일씨의 집은 또 다시 기자들의 표적이 됐다.

    암 치료도 한우물 파야

    이 무렵 이주일씨는 한가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충남 계룡산 자락의 한 암자에서 수도중인 스님이 이주일씨에게 일종의 기(氣)치료를 제안했던 것. 그 스님은 이주일씨의 열성팬으로 “한 달만 절에서 지내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주일씨는 지극한 정성에 답하기 위해 12월1일 아침 가족들과 함께 계룡산으로 떠났다.

    “그 스님이 오래 전부터 나를 좋아했다면서 강력하게 권하는 거야. 집안에만 있는 게 귀찮기도 해서 그냥 훌쩍 떠난 거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지내면 몸도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1주일 동안 그로기 상태까지 갔었어. 초죽음이 됐다니까.”

    이주일씨에 따르면 스님은 몸에서 나쁜 기운을 빼내고 새 기운을 넣어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몸을 눕혀놓고 지압을 하면서 기치료를 시도했는데, 막판에는 이주일씨가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2월7일. 이주일씨는 이날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경기도 일산의 국립암센터에 가기로 돼 있었다. 스님은 “이제부터 새 기운을 불어넣어야 한다”며 지속적인 치료를 권했지만, 이주일씨는 병원으로 떠났다.

    국립암센터의 주치의가 놀랐음은 물론이다. 의사는 “어떻게 1주일 사이에 이렇게 몸이 망가질 수 있냐?”며 입원을 권했다고 한다.

    7일 밤. 이주일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수화기에서는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이주일씨는 몸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주일씨는 열흘이나 넘게 지난 인터뷰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요. 내일 찾아와요. 병실은….”

    12월8일은 이주일씨의 진갑날이다. 해마다 이주일씨는 후배들을 초청해 생일턱을 내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이주일씨는 후배들이 단체로 인사를 오겠다는 것도 마다했다.

    8일 오후 1시. 기자는 이주일씨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30분쯤 늦게 시작됐다. 이주일씨의 부인 제화자씨가 “휴식에 방해가 된다”며 반대하고 나선 것. 기자는 로비에서 제씨부터 설득해야 했다.

    “선생님께서 조금이라도 힘들어하시면 곧바로 병실에서 나오겠습니다.”

    그제서야 제씨는 기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이주일씨의 모습은 더욱 애처로웠다. 집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

    ―계룡산에 가신 게 도움이 안 된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야. 코미디도 그렇지만, 암 치료도 한우물을 파야 한다니까.”

    기자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기치료를 견디지 못해 녹다운이 됐다가 급기야 입원까지 한 사람이 ‘블랙 코미디’라니…. 이주일씨의 타고난 코미디언 기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의학이든 한방이든 하나만 밀고 나가야지. 여기 들어와서 저쪽 내다보고 양다리 걸치면 혼란해진다고. 극과 극인데 같이 쓰려고 하면 안되지. 스님께서 자꾸 권해서 인사차 간 건데, 괜히 기운만 다 뺐어. 나쁜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좋은 기운도 다 가져갔다니까.”

    ―오늘이 진갑이시죠. 후배 연예인들이 인사를 오겠다고 합니다. 가수 김흥국씨는 대표선수들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축구공을 선물로 준비했답니다.

    “그 친구 참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

    ―조용필씨는 공연이 대성공한 모양이에요. 팬들의 요청으로 공연을 하루 연장하기로 했답니다.

    “용필이는 최고니까. 그런 가수가 나오기 힘들 거든. 요즘 너도 나도 나오자 마자 ‘국민가수’라고 떠드는데, ‘국민가수’라는 호칭은 아무한테나 붙여주는 게 아니야.”

    이주일과 조용필. 1980년대 코미디계와 가요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내왔는데, 두 사람이 벌인 공포의 술대결이 연예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1980년대 초반의 어느 늦여름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부산 공연을 마치고 해운대로 갔다.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먹기를 2시간여. 그때까지 마신 술만 30여 병이 넘었다. 그때 조용필씨가 “형님, 바닷가로 가서 더 마십시다” 하고 제의하자 이주일씨가 “그게 좋겠다. 가자”로 받았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또 10병 이상의 소주를 비우다가 바다 냄새에 취해 잠이 들고 말았던 것. 한참을 자다가 이주일씨가 눈을 떴을 때 몸은 소금에 푹 절어서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주변에는 장사하는 아주머니 10여 명이 모여서 ‘맞다’ ‘아니다’로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맞다. 이건 용필이고, 저건 주일이다. 수영하다가 빠져죽은 모양이다.”

    “아니다. 조용필이 하고 이주일이가 와 죽노. 얼굴이 비슷한 사람일 기다.”

    이주일씨는 해마다 12월이면 공연을 열었다. 이번에도 몸이 아프지만 않았으면 서울 메리어트 호텔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극장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그는 방송보다 관객을 직접 만나는 현장공연이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관객들의 표정을 보면서 그때그때 순발력을 발휘하는 즉석 코미디는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요즘 개그맨들 중에 재주 좀 있다고 잘난 척하는 친구들이 꽤 많은데, 코미디는 할수록 어려운 거예요. 우리나라 코미디언 중에 몇 백 명을 모아놓고 20분 이상 웃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5명도 안될 겁니다. 끊임없이 노력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젊은 친구들이 방송출연과 돈벌이에만 신경쓰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코미디 황제’라는 이주일도 처음부터 라이브쇼를 잘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참담한 좌절의 기억이 있다.

    1986년 12월12일. 이주일은 서울 힐튼호텔에서 최초의 코미디 디너쇼를 열었다. 이주일은 수많은 폭소탄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랐지만, 하나도 써먹지 못하고 내려왔다. 고급스런 옷차림으로 점잖게 앉아 있는 VIP들 앞에서 차마 음담패설을 꺼내지 못했던 것. 이주일은 한술 더 떠서 “사실 코미디가 저질스러워서는 안되는 거 아닙니까”라며 목에 힘까지 주었다. 그러자 객석에서는 “놀고 있네. 웃기지 않는 코미디가 무슨 소용이냐” 하는 야유가 터져나왔다.

    1년 뒤 이주일은 절치부심하며 똑같은 장소에서 명예회복을 별렀다. 이번에도 점잖은 사람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지만, 이주일은 신경쓰지 않았다. 식인종시리즈부터 낯뜨거운 성적 농담까지, 거침없이 터뜨렸다. 물론 대성공이었다. 맨 앞에 앉아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이주일을 따로 불러 “수소폭탄이 훑고 지나간 것 같아요. 내 평생 이렇게 웃은 건 처음입니다”라고 극찬했을 정도.

    그날 이주일이 확실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 바로 정치와 섹스 얘기처럼 짜릿한 코미디 소재는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보브 호프’가 되고 싶었다

    ―만일 몸이 다 낳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나는 코미디언이야. 당연히 공연을 해야지. 배우는 무대에서 쓰러지면 아쉬움이 없는 거야.”

    우문에 현답이다. 폐암과 싸우면서도 무산된 메리어트호텔 공연을 아쉬워하는 이주일에게서 그런 대답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궁금한 건 이주일이 생전에 가장 하고 싶어하는 공연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코미디 공연도 좋지만, 극장쇼 시절이 많이 생각나. 그때를 그리워하는 팬들에게 뭔가 한번쯤은 보여주고 떠나야 할 텐데…. 나는 우리나라에도 보브 호프처럼 70이 넘어서도 공연을 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어.”

    암세포도 내 삶의 일부

    이제 본격적으로 ‘코미디황제’ 이주일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암에 대해 묻기로 했다. 왠지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기분으로 암과 싸우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사로부터 암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심경의 변화 같은 것이 있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아, 내가 이 암을 이길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 같아서는 폭탄을 집어넣어서 때려부수고 싶은데, 그게 안되잖아요. 왜냐? 암도 삶의 일부거든. 이렇게 같이 살다가 함께 가는 거지.”

    ―마치 암세포를 삶의 일부로 보시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표현이 딱 맞아. 이 놈이 나를 괴롭히는데 그냥 죽여버릴 수는 없거든. 폭탄을 투하해서 산산조각을 내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귀여운 아기처럼 다루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거든. 서로 욕하고 속상해 하다가도 달래고 싶고, 밉다가도 예뻐지는, 참 오묘한 놈이야, 이 놈이….”

    이주일씨는 암세포와 자신의 몸을 전쟁에 비유했다. 어차피 누가 누구를 완전히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는 게 이주일씨의 생각이다.

    “이게 요즘 시끄러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같아요. 미국이 엄청나게 폭격을 퍼부었지만, 그게 이긴 거는 아니잖아요. 많은 민간인이 죽고 다쳤는데 그게 무슨 승리야. 내 몸도 똑같아. 아무리 암세포를 죽이려고 해도 다 죽일 수는 없거든. 이놈을 완전히 죽이려면 내가 폭탄을 끌어안고 같이 죽는 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이기는 건 아니야.”

    이주일씨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떠올렸다. 또 다시 옛 일이 떠오른 것이다. 열살 때 고등어 궤짝에 숨어 38선을 넘었고,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던 풍운아가 바로 이주일씨다.

    이주일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북한 땅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어업조합서기를 지냈기 때문에 집안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견디지 못한 아버지가 먼저 월남하고, 이주일도 그 뒤를 따랐다. 5대 독자를 살리겠다고 고등어배 선장을 매수한 어머니와 온 몸에 우글거리는 이를 잡기 위해 살충제를 뿌리던 아버지…. 이주일은 부모님 얘기가 나오자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주일아, 술 먹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술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치는 모습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아주 성실한 분입니다. 독자로 태어나서 공무원이 되셨죠. 남들 같으면 떵떵거리고 살 수도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고지식했거든. ‘와이로’가 안 통하는 분이야. 딱 봉급날 가져오는 돈 말고는 한푼도 없어. 그러면서도 남 도와줄 때는 아끼지 않고….”

    이주일씨의 말문이 닫혔다.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살아 생전에 효도 한번 해드리지 못한 것이 나이가 들수록 가슴에 맺힌다는 이주일.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 채 애주가가 되었고 술장사까지 벌였다.

    학창시절 정학과 퇴학을 반복할 때 이주일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다시는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도 또 다시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는 이주일씨. 그는 방송에서 2주일 만에 떴다고 해서 아버지가 물려준 성까지 이가로 바꾸는 ‘불효’를 저질렀다.

    분위기를 바꾸기로 했다.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서 이주일씨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하게 작아졌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주일씨가 가장 즐거워하는 주제는 축구다.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는 월드컵 조편성에 대해 물으니, 아직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며 궁금해했다.

    ―포르투갈 폴란드 미국이 걸렸습니다.

    “아휴, 이걸 어쩌나.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이주일씨는 축구 얘기가 나오자 정신이 번쩍 나는 듯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축구전문가답게 월드컵을 전망했다.

    “16강진출은 고사하고 1승도 힘들게 생겼는데. 포르투갈은 우승후보 아냐? 폴란드도 강하고, 미국도 축구열기가 대단하던데.”

    ―히딩크 감독은 폴란드와 미국을 잡고 16강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에이, 힘들어. 월드컵이 어디 장난인가? 그런데 일본은 어떻게 됐어?”

    ―러시아 벨기에 튀니지예요.

    “거긴 좀 낫구만.”

    ―F조가 가장 치열해요.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가 속했어요.

    “그건 죽음이구만. ‘죽음의 조’야.”

    이주일씨는 진심으로 월드컵을 걱정하고 있었다. 88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이 잘 싸웠기 때문에 국민들이 힘을 냈던 것처럼, 월드컵에서도 한국이 좋은 성적을 내야만 한국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가 말이야 홈에서 물을 먹으면 국민들이 실의에 빠져서 일할 마음이 사라진다니까. 그러면 사업이고 뭐고 다 엉망이 되는 거야. 범죄가 생기고 멀쩡한 사람이 타락하고 국민 전체가 자포자기해서 암에 걸려. 너도 나도 ‘이젠 다 죽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단 말이야. 월드컵은 우리나라 국력이 달린 문제야. 첫 게임만 이기면 불이 붙을 거야. 그러면 그 힘으로 밀어붙여서 16강까지 가는 거야.”

    이주일씨는 1980년대 축구붐 조성을 위해 후배 연예인들과 ‘무궁화 축구단’을 만들었다. 당시 무궁화 축구단은 프로축구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었다. 1986년 동대문운동장엔 연예인들의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3만 관중이 들어찬 적도 있다. 바로 이 경기에서 이주일씨는 후반 동점 상황에서 그림 같은 중거리슛을 성공시켰다. 이주일씨는 그때 얘기만 꺼내면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면서 400m 트랙을 두 바퀴나 돌던 추억을 떠올린다.

    “우리가 월드컵에서 사고를 치려면 무엇보다 기자들과 축구팬들이 도와줘야 해요. 한번 졌다고 ‘죽일 듯이’ 몰아붙이면 기가 죽어서 플레이를 제대로 할 수가 없거든. 이젠 시간도 없으니까 못해도 ‘잘한다. 더 잘해라’ 하면서 응원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선수들이 힘이 나서 더 잘 뛸 수 있죠.”

    암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이주일씨는 1990년대 이후 축구를 그만두었다. 체력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파란만장한 ‘사건’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이주일씨가 가까이 한 것이 골프와 낚시다.

    ―골프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골프도 암과 똑같아. 자신과의 싸움이거든. 공이 잘 맞든, 옆길로 빠지든 꾸준히 목표를 향해 가는 거야. 공이 안 맞는다고 누구를 탓할 것도 없어. 모두가 자기가 친 볼이니까.”

    ―낚시를 즐기시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요.

    “그렇지. 낚시는 자기와의 결투지. 골프보다 더 치열한…. 헤밍웨이인가 거 있잖아. ‘노인과 바다.’ 파도와 싸우는 노인….”

    ―선생님은 암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규정하신 것 같군요.

    “나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라고, ‘암’을 준 것 같아. 이왕 싸움이 붙었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이겨야지.”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고갔다. 이주일씨는 암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놓았다가, 다시 자신의 몸과 일치시키곤 했다. 어느 순간 삶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다가는, 갑자기 삶의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암 때문에 고통받는 환자들이 전국에 참 많습니다. 선생님께서 암과 싸워서 이긴다면, 그분들에게도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암과 같이 생활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오래 살면 살수록 많은 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겠지. 나도 내가 잘 살아서 암환자들에게 좋은 얘기도 해주고 싶은데 지금은 내 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자신할 수가 없어. ‘내가 암을 겪어보니까 어떻더라. 암은 이렇게 하니까 이겨낼 수 있더라’ 그런 말을 해야 암환자들이 희망을 찾을 거 아냐. 하지만 지금은 암과 친구하면서 그냥 지낼 수밖에 없어. 이 다음에는 더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르고….”

    ―선생님께서 몇 달 동안 겪어본 암은 어떤 것 같습니까. 살아가다가 갑자기 암을 만난 사람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보세요.

    “암도 코미디나 똑같아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TV에 나오는 코미디로 봤으면 해요. 코미디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즐길 수 있는 놈이거든. ‘암은 코미디고, 내 몸은 코미디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재미있잖아요. 그렇게 마음먹으면 병을 고칠 수 없더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요.”

    ―선생님은 힘들 때가 없었나요? 암이란 게 무작정 즐기기에는 너무 무서운 병이라서….

    “왜 없었겠어? 아휴, 이제 내가 끝을 내야지, 오늘로 끝장을 보자, 다 정리하고 떠나자. 그런 생각도 들지. 그러다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새로운 꿈을 꾸고, 또 하루를 보내는 거야.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환상도 코미디로 한다니까

    이주일씨는 요즘 몸에 열이 오를 때마다 환상이 보인다고 했다. 몸이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할 때면 창문 밖으로 허상이 나타나는데, 나중에 가족들에게 그 얘기를 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앞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데, 나를 향해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는 거야. 그 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들려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착각할 때가 있어. 내 꿈이 수백만 명을 한꺼번에 웃기는 건데, 실제로는 그렇게 못했거든. 그게 늘 아쉬웠는데, 환상에서 엄청난 코미디 공연을 한 거야. 잠시 동안이었지만….”

    ―선생님께서 공연을 너무 하고 싶어하시니까, 그런 욕망이 꿈으로 나타난 모양입니다.

    “글쎄. 내 생각엔 내가 나를 그냥 이렇게 정리하려는 거 같아.”

    14대 국회 시절이었다. 의원회관 734호실 정주일 의원의 방은 문이 닫혀 있을 때가 많았다. 정의원은 지역구 행사는 물론 동료 정치인들의 경조사를 찾아다니기 바빴다. 정의원이 가면 화제가 되고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원은 “정책을 검토해야 할 시간에 상가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더 많았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이번에 문병을 온 정치인들은 많았습니까.

    “거의 없어요. 나야 뭐 현역 정치인도 아니고. 또 요즘 정치권이 얼마나 바쁩니까.”

    ―한 분도 안 왔어요?

    “저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김원길 장관과 신영균 의원이 오셨어요.”

    문밖에는 여러 명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주일씨의 진갑을 맞아 병원으로 찾아온 친척들이었다.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주일씨는 자신이 구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편지를 읽고 친필로 서명했다. 손 끝에 힘이 빠져 글씨가 갈라졌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이주일’이라고 썼다.

    ―어려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건강을 회복하시길 빌겠습니다.

    “충분히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주일씨는 요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기’를 쓰고 있다. 부디 그 ‘일기’가 이씨가 남긴 ‘유고집’이 아니라, 이씨가 직접 출간하는 ‘회고록’이 되기를 빈다. 그것이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불씨를 살려낸 ‘코미디황제’의 다큐멘터리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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