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386’ 7년... 여전한 전위부대, 그러나 주류 꿈꾸는 파워맨들

  •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3-11-25 19: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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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6과 80년대 코드는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맛없는 식은 피자인가. 30대라는 생물학적 연령에 제한받는, 유효기간이 지난 패스트푸드인가. 80년대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살기를 원했고 90년대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외쳤던 그들에게 386이란 무엇인가 다시 물었다.
    ‘386’ 7년... 여전한 전위부대, 그러나 주류 꿈꾸는 파워맨들

    386이란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열린공간30’ 회원들. 98년 8월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 됐던 백태웅씨 (서울대 법학81·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의 출소를 기념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사진은 ‘신동아’ 98년 12월호 ‘우리는 동인’에 게재됐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정신적 83학번’이니 ‘386정치인’이니 하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1946년생으로 오십대 후반줄에 접어든 노대통령이 주변의 386참모들을 거리낌없이 ‘내 친구’ 혹은 ‘동지’라 부르는 데 기인한 것이지만, 노대통령 스스로 “(1987년) 6월항쟁은 내 존재의 근거”라 할 만큼 80년대 정서를 소중히 여긴 것도 사실이다.

    노대통령은 올 6·10항쟁 16주년 기념식에 보낸 메시지에서 “4·19혁명과 부마항쟁, 광주항쟁에 이어 6월항쟁에서 분출된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이 참여정부를 탄생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무현 코드’는 80년대 정서요, 참여정부의 정신적 지지기반은 386세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 386이란 말은 식은 피자처럼 느껴진다. 1999년 정가에 ‘젊은피 수혈론’이 일 때만 해도 386은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피자였다. 2000년 총선을 전후로 386은 각광을 받았지만 이내 ‘386과 기성세대가 다를 게 뭐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그리고 잠시 묻혀있던 386은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과 함께 ‘참여정부의 주역’이란 이름으로 재등장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얼마 못 가 ‘세대갈등의 진원지’ ‘무능한 아마추어’라는 빈축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386은 끝났다’는 비판도 들린다.

    과연 그럴까. 386과 80년대 코드는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맛없는 식은 피자인가. 아니면 30대라는 생물학적 연령에 제한받는, 유효기간이 지난 패스트푸드인가. 7년 전 세상에 386이란 용어를 처음 선보였던 ‘열린공간30’의 회원들이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근황을 추적했다. 이 모임은 오늘의 386을 이해할 수 있는 축소판이다. 80년대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살기를 원했고 90년대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외쳤던 이들에게 386이란 무엇인가 다시 물었다.

    휴화산 같은 30대



    “지나간 세월을 한번 접어 아직 남은 열정에 지혜를 모아야 할 나이, 30대. 그 이립(而立)의 나이 30대에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고 싶은 충동을 어쩌지 못하는 휴화산입니다.” 이것은 김종민씨(서울대 국문83)가 쓴 ‘열린공간30’ 창립 취지문의 일부다. 김씨는 현재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으로 재직중이다.

    1996년 12월7일, 80년대 초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던 30대 200여 명이 ‘열린공간30’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대학로에 둥지를 마련했다. 이름하여 ‘동숭동에서’. 점잖게 무슨무슨 포럼이나 학생운동세대답게 서클룸도 아닌 그냥 술집이었다. 부담 없이 만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자는 의미였다.

    “90년대 초 우리는 성취하지 못한 자괴심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뿔뿔이 헤어졌다. 그리고 각자 진로를 모색하며 거처를 마련했다. 고시준비를 하거나 학교로 돌아가거나 학원 강사가 되거나 벤처기업가라는 타이틀을 마련했어도 가슴에는 어쩌지 못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3년 뒤 누구랄 것도 없이 ‘더 늦기 전에 저지르자’며 하나둘 다시 모였다.”(김종민)

    열린우리당 송영길 의원은 “뚜렷한 목적의식보다는 화롯불처럼 몸을 맞대야 꺼지지 않는다는 연대의식이 강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모임의 대표는 이정우 변호사(서울대 법학81)가 맡고 송영길(연세대 경영81), 이왕준(서울대 의대83), 한창민(연세대 철학82), 김종민 등 81·82·83학번이 주축이 됐다.

    이정우 변호사는 연세대 송영길, 고려대 김영춘(영문81)과 함께 1984년 초대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 삼총사는 대학의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직선제 총학생회를 부활시켰지만 이후 수배, 구속, 제적의 수난을 겪었다. 80년대 중반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이들 불법 총학생회장 삼총사는 96년 ‘열린공간30’에서 다시 의기투합했다.

    ‘386’ 7년... 여전한 전위부대, 그러나 주류 꿈꾸는 파워맨들
    90년대 들어 조직운동의 한계를 느낀 이정우씨는 고시를 돌파구로 삼았다(이후 운동권에 고시바람이 불었다). 그가 90년 외무고시, 91년 행정고시와 사법고시를 모두 통과해 고시3관왕의 영예를 안자 곧바로 정치권에서 20대의 전국구 의원(14대)이라는 제의가 들어왔으나 그는 정치적 재야이기를 고집했다. 대신 대중운동과 정치운동을 매개로 한 세대운동을 모색하며 ‘열린공간30’을 만들었다. 이 무렵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뒤늦게 고시에 도전한 송영길씨가 1994년 사시에 합격했고, ‘의료계 마당발’로 통하는 이왕준씨가 서울대 레지던트가 되는 등 핵심멤버들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숨을 고르던 시기였다.

    신조어 386의 탄생

    ‘열린공간30’은 대기업에 다니던 황도순씨(고대 법학82·현 능률영어사 상무)를 영입해 ‘동숭동에서’의 경영을 전담케 했다. 황씨는 “대학 다닐 때는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일종의 부채감이 있었다. 각 분야에 자리잡은 386들이 다시 모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보자는 취지가 좋아서 합류했다”고 말한다.

    386이란 말은 카페 이름을 짓기 위해 이들이 머리를 맞댄 자리에서 튀어나온 부산물이었다. 그 무렵 ‘디지털조선일보’에 근무했던 한창민씨(현 박영률출판사 기획위원)가 컴퓨터 CPU에 빗대 “60년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30세가 된 사람을 가리켜 신조어 386”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카페 이름으로는 너무 생경하다는 비판에 밀려 ‘동숭동에서’로 낙찰됐다.

    386카페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당시만 해도 30대는 20대와 40대 사이에 끼어 갈 곳이 없는 어정쩡한 세대 취급을 받았다. 그런 그들이 30대 문화 만들기에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젯거리였다. 언론이 앞다퉈 이 공간을 소개하자 학창시절의 ‘열정’을 부여잡고 무작정 찾아오는 30대도 있었다. 김상백 세화여중 교사(서강대·81)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열린문화공간이 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토론회나 강연, 영화 상영, 작은 공연도 수시로 열렸다. 경제적 이유로 건강한 공간 하나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동숭동에서’는 1999년초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고, 둥지를 잃어버린 ‘열린공간30’도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386이란 용어는 오히려 그때부터 세상에 널리, 깊숙이 퍼져나갔다.

    80년대 운동에 대한 반성

    활동 기간은 2년에 불과했지만 ‘열린공간30’이 남긴 것은 단지 386이라는 신조어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386세대의 운동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는 뒷전이었다.

    “80년대 운동은 두 가지 성격을 갖는다. 정당이나 연구회, 포럼 등을 통한 정치운동이 있고, 그 형태는 뚜렷하지 않으나 386정서를 담은 문화운동이 있다. 80년대의 에너지를 담아낼 그릇으로 이미 정치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까지 정치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가 컸다.”(황도순)

    ‘동숭동에서’는 매달 주제를 갖고 관훈토론식 포럼을 열었다. 그 중에서도 1997년 가을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은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노변호사는 92년 14대 총선, 95년 부산시장 선거, 96년 15대 총선에서 연거푸 낙선하고, 야권통합과 ‘3김청산’을 주장하며 조직된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에 몸담고 있다.

    “2시간 정도 노변호사가 자신이 걸어온 길과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뒤늦게 운동에 뛰어들어 인권변호사가 된 그의 의식화 연령은 386과 비슷했다. 특히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대한 강한 ‘로열티’를 보였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만약 전민련에서 의원 배지를 떼라면 뗄 각오가 돼 있었다는 말도 했다. 그만큼 진정성을 갖고 운동을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1~2년 정도 지나보니 실제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런 각오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다는 말도 했다.”

    ‘386’ 7년... 여전한 전위부대, 그러나 주류 꿈꾸는 파워맨들
    1989년 1월 결성된 전민련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분열과 패배로 침체에 빠져있던 재야 민중 운동 진영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결성한 단체로 6·25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사회운동연합체였다. 노변호사의 고백은 학생운동시절부터 전략·전술에 능한 정치공학 세대인 386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이 말을 전해준 한 회원은 “노무현의 진정성에서 치밀한 공학성을 뛰어넘는 어떤 힘을 느꼈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열린공간30’은 80년대 후반 운동에 대한 자기반성과 아울러 인간 노무현에 대한 신뢰를 쌓게 됐다.

    그러나 초기 ‘열린공간30’은 끊임없이 진로문제로 고민했다. 연세대 총학생회 기획부장 출신인 한창민씨는 모임이 정치지망생 조직으로 변질되는 것을 반대했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MT를 하며 이 문제를 논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치로만 우리사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 각 분야에서 변화를 모색해 보자. 그것이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냐 문화운동이냐

    그 무렵 그들은 프랑스 ‘클레르 몽페랑 영화제’를 소개한 기사에서 영감을 받았다. 단편영화의 ‘칸영화제’라 불리는 이 영화제는 인구 45만의 작은 도시 클레르 몽페랑에서 열흘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열린다. 그러나 상업성이 떨어지는 단편영화를 보기 위해 매년 1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간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사는 클레르몽 영화제의 성공 뒤에 영화제위원회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모두 1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아무런 직함 없이 영화제를 위해 헌신했다. 그들은 ‘68세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영화제를 열었다. 그들에게 68세대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었다. “개혁은 끝나지 않았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사회 곳곳에서 진지전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는 기사내용은 386들에게 다시 꿈을 꾸게 했다.

    “유럽의 68세대는 혁명을 꿈꿨다. 그들은 ‘기동전’에서 실패했지만 문화운동이라는 ‘지구전’으로 68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한국의 80년대는 역동의 시대였다. 그만큼 ‘철학적 안정감’이 부족한 시대이기도 했다. 문화운동은 지구력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정당으로 들어가 정치를 하는 것보다 문화운동이 한국사회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한창민)

    ‘운동권 기획통’으로 알려진 한창민씨는 87년 ‘복학생협의회’에서 활동할 때 일찌감치 김대중, 김영삼 양측으로부터 입당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기성정치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고 이후로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졸업 후 줄곧 나눔기술, 사이버저널, 디지털조선일보, 한겨레뉴미디어국 등 IT분야에 몸담다 최근 출판사 기획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열린공간30’의 문화운동파로는 우리마당 지킴이 김기종씨(성균관대 법학·80)도 빼놓을 수 없다. 1984년 노래방과 술집이 즐비한 신촌에 자리잡은 ‘우리마당’은 막 우리문화에 눈 뜬 대학생들에게 단소, 판소리, 풍물, 대금, 대동놀이, 마당극, 마당굿 등을 보급했다. 또 80년대 운동권들의 은신처이자 전대협, 인의협, 건치, 한총련 등이 ‘거사’를 모의한 장소이기도 했다. 김기종씨는 93년 신촌 우리마당에 ‘새터주민교실’을 열었는데 이때 노무현 변호사가 생활법률강좌를 맡았다. 그가 ‘열린공간30’에 합류한 것은 대학로에 ‘우리마당’과 같은 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지만 모임의 무게 중심이 정치로 기울면서 문화는 뒷전이 됐다.

    한편 송영길 변호사는 80년대 정신을 정치로 계승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운동권 선배들과는 다른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도권 참여파의 행보

    “직업으로 정치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70년대 선배들은 엄혹한 유신시대를 겪으며 지사적 자세로만 정치를 하다 보니 조직적 개념이 부족하고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그래서 386들은 각자의 전문영역을 마련하고 그 토대 위에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생활정치를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이왕준 ‘청년의사’ 발행인 겸 인천 사랑병원 원장도 송변호사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출마를 통해 일자리를 찾는 ‘정치예비군’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이원장은 80년대 중반 의대생들의 모임에서 활동했고 86년 자민투 조직부장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복학 후 서울대병원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일반외과 전문의가 됐고 92년에는 386 의사들의 모임인 ‘청년의사’를 조직해 같은 이름의 의사신문을 발행하면서 의료개혁 운동에 뛰어들었다. 98년말 의료계 386 운동권들 중심으로 인천사랑병원을 설립할 때도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중소병원’을 선언해 현장 의료개혁을 부르짖었다. 지난해에는 ‘외국인 노동자 건강권 보장을 위한 의사 선언’을 주도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그는 착실히 의사의 길을 걸었지만 한번도 운동이나 정치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열린우리당 구로을 지구당 사무국장인 남승우씨(서울대 정치학81)는 84년 서울대 학원자율화추진위에서 활약했다. 졸업 후 구로노동연구소를 거쳐 95년 구로구의회에 진출해 재선을 했다.

    ‘386’ 7년... 여전한 전위부대, 그러나 주류 꿈꾸는 파워맨들
    “외국에서는 기초 자치단체 경력을 쌓고 중앙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는 아래로부터의 충원구조다. 그리고 장관을 한 사람이 자신을 키워준 정치적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로 치면 구의원이 되어 지역에 봉사한다. 그런 이상적인 정치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당 실력자에게 낙하산식 공천을 받는 현실정치의 벽은 그에게 너무 높았다. 공정한 경선 체제가 아니라면 돈 없고 힘 없는 정치신인들에게 기회가 돌아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고려대 이인영(국문84), 연세대 우상호(국문81) 총학생회장과 함께 87년 6월항쟁을 주도했던 이남주씨(서울대 경제84·전 총학생회장)는 두 차례 감옥에 다녀온 후 운동을 접고 학교로 돌아갔다. 92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과정을 밟은 뒤 중국 베이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2000년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이교수가 귀국했을 때는 마침 ‘젊은피 수혈론’에 힘입어 386 간판스타들이 대거 정치권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그에게도 출마권유가 있었다. 당시는 학생운동 경력에 전문성을 갖춘 386의 몸값이 상한가였다. 이교수 자신은 출마를 고사했지만 386세대의 정치적 진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80년대 누구보다 앞장서 한국사회의 문제를 고민했고, 사회적 기대가 큰 만큼 쉽게 기성정치구조에 물들지 않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토플’ 저자이며 대학가 유명 영어강사였던 이호열씨(고대 법학81)는 학창시절부터 이정우 변호사와 막역한 사이로 ‘열린공간30’에 합류했다. “학생운동 경력을 가지고 곧장 정치에 뛰어드는 시대는 지났다. 386세대가 역사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을 갖고 있다면 전문성과 균형감각을 갖춰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법학과 영어를 자신의 전문영역으로 설정하고 현재 어학 전문 인터넷회사인 온코리아닷컴과 온잉글리시어학원을 경영하며 국제디지털대 법학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당장 정치를 하든 안 하든 이들은 386세대 정치세력화를 위해 한 명의 스타가 아닌 팀워크가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같다. 이정우 변호사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열정, 변하지 않는 역사적 신념, 대중과 하나될 수 있는 꿈과 비전을 통해 386세대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것이 정치불신 시대의 종식을 앞당긴다”며 세대 네트워크를 강조했다(‘말’ 99년 5월호 ‘386리더’). 그가 92년부터 숱한 출마와 입당 권유를 뿌리친 것도 그런 소신 때문이었다.

    연극은 배우가 만드는 게 아니다

    이왕준 원장은 386이 꿈꿔온 정치세력화를 ‘연극판’에 비유해 설명한다.

    “정치는 연극과 같다. 연극을 하려면 대본, 연출, 기획, 제작 그밖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많은 스태프가 필요하다. 스포트라이트는 배우가 받지만 연극은 배우가 하는 게 아니다. 대본 없는 연극을 보았나.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 가장 적합한 인물을 뽑으면 된다. 3김시대의 한국정치는 혼자 대본 쓰고 연출하고 제작비 대고 주인공까지 맡는 1인 제작시스템이었다. 그 시대가 끝나고 이제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할 때다. 그런데 아직도 개혁정치, 지역구도 극복, 통합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연극을 만들고 있으니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 관객들도 변해야 한다. 새로운 연극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덧붙여 이원장은 “내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이 아니라 대통령 3명쯤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꾼다”고 했다. 참여정부 초기 386참모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낸 생일카드에 “우리의 도구로서 변함없이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는 내용이 있다 해서 화제가 됐지만, 사실 386 내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도구론’이 검토됐다. 노대통령의 386 핵심참모 중 한 사람인 안희정씨(고대 철학84)도 ‘열린공간30’의 멤버였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낙선하자 이정우씨를 비롯한 몇 명이 그를 찾아가 민주당 탈당을 제안하기도 했다. 지역 기반의 당으로는 한계가 너무 뚜렷하니 새로운 정치를 하려면 제3의 길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즉답을 피한 노변호사는 다른 자리를 빌려 “영남 출신인 내가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당에 있는 것도 의미가 있다. 정치에 제3의 길도 있지만 그것은 한국의 극심한 지역 대결구조를 깨고 난 이후의 문제”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에도 견고한 지역구도가 깨지지 않자 그들이 제안한 ‘제3의 길’(신당)을 택했다. ‘열린공간30’ 해체 후 정치공동체인 ‘제3의 힘’이 만들어졌고 훗날 이들 중 상당수가 ‘노무현 신당’에 합류했다.

    1999년 386들이 첫 번째 ‘도구’로 선택한 스타플레이어가 송영길 변호사였다. 6·3재선거를 앞두고 ‘송영길을 격려하는 386세대 모임’이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이정우, 이인영, 우상호, 오영식(고려대 법학84·전총학생회장·전대협 2기 의장), 정태근(연세대 경제82·전총학생회장), 허인회(고려대 정외82·전총학생회장), 임종석(한양대 무기재료86. 전대협 3기 의장) 등이 동참했다. 이들은 당을 찾아가 ‘공천압력’을 넣는 것부터 유세현장에서 직접 뛰는 것까지 팀워크를 발휘했다.

    비록 첫 번째 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386세대의 정치세력화는 보다 구체적인 과제가 됐다. 6·3 재선거 직후 이호윤(서울대 정치81)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이끄는 ‘21세기전략아카데미’는 ‘한국정치의 개혁과 젊은 세대의 역할’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기존 정치권 행태를 답습하는 386의 자아비판이 이뤄졌다. 과거 운동권 경력을 정치적 출세를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386에 대해 ‘정치적 오렌지족’이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공인회계사 이정희씨(서울대 경영79)는 “386이 총선을 겨냥한 구색 맞추기형 개별영입에 응하거나 이를 구걸해서는 안 된다”며 “미래정치를 구상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청년 정치조직을 꾸리자”고 제안했고, 낙선한 송영길 변호사는 ‘젊은 전국정당화론’을 내세워 당을 초월한 386세대의 연대와 조직화를 주장했다. 이호윤 21세기전략아카데미 회장, 이정희씨 모두 ‘열린공간30’에서 활동했다.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가장 먼저 제도권에 진입한 사람은 김영춘 의원(열린우리당)이다. 87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고 93년 김영삼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일하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김민석 전 의원(서울대 사회82)은 김영춘 의원에 비해 1년 늦게 정계에 들어왔지만 국회의원 배지는 4년 먼저 달았다. 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그는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의 배후혐의로 2년9개월을 복역하고 곧바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한 차례 낙선을 거쳐 96년 최연소 국회의원, 2000년에는 이미 재선의원이 되는 등 서울시장 선거 패배 전까지만 해도 제도권에서 늘 386의 선두주자로 거명됐다. 그러나 386정치세력화를 꿈꾸는 이들은 김 전의원의 독주를 반기지 않았다. ‘혼자 가는 1등’으로는 정치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열린공간30’이 해체되고 정치색이 강한 ‘제3의 힘’이 출범했다(99년 10월). 이정우, 우상호, 송영길, 김영춘, 박정운, 이인영, 임종석, 허인회, 이규희, 오영식, 정태근, 함운경(서울대 물리학82), 고진화(성균관대 사회학82·전총학생회장) 등 정치권 진입을 위해 ‘때를 고르던’ 8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이 총집결했다. 이 모임에서도 이정우 변호사가 총무를 맡았다.

    ‘제3의 힘’ 꿈과 좌절

    이들은 ‘전후세대 중심의 정치시민운동’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연속 3회 이상 출마금지’ ‘날치기 반대’ ‘재산과 능력의 3% 사회환원 운동’과 같은 참신한 행동강령도 마련했다. 내심 2~3년 후 386이 중심이 된 독자적인 신당 창당도 꿈꿨다.

    초기 ‘제3의 힘’ 실무위원으로 참여했던 최원우씨(외국어대 영어84·현 청산학원 원장)는 “제도권과 비제도권이 정파와 정당을 초월해 새로운 정치 기초를 닦아보자는 취지는 좋았으나 현실 정치인은 먼저 제도권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말한다. ‘제3의 힘’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발견했다. 제도권 진입을 위해서는 기성 정당의 공천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추후 원대복귀’를 조건으로 다시 흩어졌다.

    임종석 송영길 우상호 이인영 허인회는 민주당으로, 고진화 정태근 박종운 원희룡 김영춘 김부겸은 한나라당으로 갈라섰다. 그 중에서 임종석, 송영길, 김영춘, 원희룡, 김부겸 등이 16대 총선에서 원내 진입에 성공했지만,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라기보다 기성정치의 ‘회춘’을 위해 말 그대로 ‘수혈’된 수준에 그쳤다. 여기에 2000년 5·18 광주 술자리 사건은 386의 도덕성마저 의심받게 만들었다. 더 이상 자신의 이름 앞에 386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1999년 서울대 한상진 교수(사회학)가 386세대 1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386세대의 자화상을 보면 ‘비판적 성향이 강하다’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과잉의 경향이 있다’ ‘다른 어떤 세대보다 소외된 집단에 대한 이해심이 높다’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끈끈한 유대와 동질성이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386의 부정적 측면은 ‘일상적인 편가르기 및 적대감’ ‘지나친 정치 지향성’ ‘연공서열을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 등으로 나타난다(‘신동아’ 2003년 6월호 ‘참여정부 주역 386연구’).

    2004년 선거와 386

    1980년 광주항쟁을 출발점으로 1987년 6월을 통과하며 자란 386세대들은 연대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최원우 원장은 “남자 둘만 모이면 군대 이야기를 한다지만 386들은 둘만 모이면 운동 이야기를 한다”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이 바로 386 정서”라고 말한다.

    때론 이런 386세대의 ‘집합성’이 다른 세대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최근 정계에 불어닥친 ‘386음모론’이나 ‘세대혁명론’이 그것이다. 51년생인 예술평론가 이수태씨는 웹진 ‘컬티즌’에 기고한 글 ‘노무현 대통령과 386세대를 생각한다’에서 이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선명한 코어(core)만으로 선봉을 만들어 낡고 병든 것들을 개혁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는 필요이상으로 현실을 병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스스로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도덕적 결벽성을 강박하고 있다. 개혁 주체는 더 선명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박리(剝離)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고 그런 분화현상은 민주당의 분열과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천명에서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이처럼 386세대를 향한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느끼며 386정치인들은 2004년 17대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4년 전 ‘젊은 피’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 시험대를 통과해야만 한다.

    “단순 정치예비군으로 존재하던 386들은 2004년 선거를 통해 검증받고 걸러질 것이다. 그러나 386세대는 여전히 전위부대일 뿐 우리사회의 주도세력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제 386세대는 3김의 공백을 메우는 차원이 아니라 20년 정치 지형을 바꿀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이왕진)

    “386세대가 386정치인들에게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운동 경력만으로 그들을 평가할 수 없다. 이제 정치인으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는 386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황도순)

    남승우씨는 “386이란 80년대라고 하는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몸부림이 응축된 개념”이라며 “정치하는 386 외에도 그 시대를 고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벤처기업 스마텍엔지니어링의 홍성영 사장(서울대 토목공학82)은 운동권 출신이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운동권 출신 386이 보여준 행보에 대해 불만이 많다. “학생운동 바람, 학원 바람, 한의사 바람, 고시 바람, 벤처 바람, 정치 바람 등 운동권들은 유행의 진원지였다. 한편으로는 진취적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시류에 영합하는 것 같아 신뢰감이 떨어진다. 386세대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우직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덧붙여 홍사장은 “386 프리미엄을 갖고 정치를 하든 말든 이제 386 전체가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다.

    푸르렀던 날들은 현재 진행형

    정치입문 15년째인 김민석 전 의원은 ‘국민통합21’ 파동 이후 1년의 휴식기간을 갖고 자신의 정치 여정을 이렇게 되짚는다.

    “88년 출옥했을 때 운동권에서는 참여파와 재야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나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이제 제도권 정치로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선의원 시절에는 재야 출신도 의정활동을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면 됐다. 젊은 사람이 의정활동을 잘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젊은 국회의원 시절은 끝났다. 또박또박 문제를 짚어내고 비판 잘하는 젊은이의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386에게 아마추어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내용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혁’을 외치지만 뭘 하려는지 불분명했다. 저 사람이 하려는 정치가 무엇인지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박원순 변호사는 386세대의 ‘그 푸르렀던 날들은 현재 진행형’이라며 여전히 386세대에게 희망을 건다.

    “80년대 학번들은 때로는 386이라는 단어로 미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매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로 뛰어들어 세상의 주목을 받은 그 몇 사람으로 그 세대를 모두 평가할 수는 없다. 나는 오히려 믿는다. 그때 ‘그 푸르렀던 날들’을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졌던 보편적인 언어로서의 시대에 대한 통찰력과 고뇌와 책임의식은,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나는 믿는다.”(박원순, ‘386세대 그 빛과 그늘’에서)

    조성만, 박종철, 이한열, 박래전, 최덕수. 그 이름을 듣고 아직도 불덩이가 솟구치면 당신은 386이다. 이한열의 장례식장에서 문익환 목사가 부르짖던 ‘한열아’,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로 시작하는 ‘동지가’의 한 소절, 김하기의 소설 ‘완전한 만남’ 그 기억의 조각들을 부여잡고 있으면 당신은 386이다. 그들은 아직도 ‘동지가’를 부르며 꿈을 꾼다. 함께 꿈을 꾸면 꿈이 현실이 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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