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 위기 ‘광주비엔날레’
미술인-공무원 진흙탕 싸움…영입해간 총감독 느닷없이 해촉

"광주비엔날레가 타이타닉호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2000년 제3회 행사를 15개월 앞둔 광주비엔날레가 거대한 빙산에 부딪혔다. 지난 12월21일 광주비엔날레의 총책임자인 최민 전시 총감독과 6명의 학예연구관이 자리에서 쫓겨난 것. 즉시 젊은 미술인들은 이를 '행정폭거'로 규정하고 '광주비엔날레 정상화 및 관료적 문화행정 철폐를 위한 범미술인 개혁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광주비엔날레가 이 지경에 이른 가장 큰 원인은 미술 전문인 집단(비엔날레 재단)과 광주시 공무원 집단(광주 시립미술관) 사이의 갈등이다. 이는 광주비엔날레의 태생적 약점이었다. 광주비엔날레는 95년 정부가 광주 민중항쟁의 상흔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50억원을 쏟아부어 시작됐다. 그래서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인들의 행사인 동시에 세계 미술인들의 축제였다. 이런 이유로 비엔날레 재단은 광주시립미술관의 기존 조직에 비엔날레를 열 수 있는 외부 미술전문가들이 결합한 특수한 구조를 갖게 됐다.

그러나 비엔날레가 진행되면서 조직 구성원 사이의 갈등과 불신은 심화됐고, 제2회 비엔날레 기간 중에는 미술전문인들과 시 공무원들 사이에 주먹질이 오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제3회 비엔날레를 앞두고 '전시총감독'이라는 전례없는 자리를 만들고 여기 최민씨를 영입한 것도 이같은 갈등의 소지를 없애고 민간 전문가의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이는 외국 비엔날레의 사례를 볼 때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광주에 내려간 최민 전시총감독은 비엔날레 조직에서 겉돌 수밖에 없었다. 전시기획만을 할 수 있을 뿐, 비엔날레 행사 전반에 대한 기획은 그의 권한 밖이었다. 최씨는 "인사권이 없어서 전문 인력을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산집행시에도 일일이 사무국의 허가를 맡아야 하는 허수아비였다"고 말한다. 여기에 최전감독이 반대한 학예연구실장 인사안이 그가 외국에 간 사이 시장에게 올라가는가 하면, 비엔날레 재단 18명이 '재단 직원들의 무능력'을 지적한 지역신문을 고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정적으로는, 최전감독이 전시실무를 추진하기 위해 조직한 '전시종합계획 수립단' 관련 문서의 내용이 중간에 뒤바뀌는 일이 벌어지면서 최전감독이 "일을 못하겠다"는 발언을 했고 이사회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해촉해 버렸다.

최전감독과 '개혁위원회'는 이번 비엔날레 사태가 '문화지원행정이 문화억압행정으로 변질'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서 이번 기회에 "문화정책과 문화행정에 대한 지속적 비판과 감시, 대안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비엔날레 재단, 즉 미술전문인들이 사실상 광주미술관 조직에 흡수된 현재의 비엔날레 조직이 기형적이라는 점은 미술관 공무원들도 인정한다. 제2회 비엔날레 조직에서 일했던 한 미대 교수는 "공무원들이 얼마나 미술인들을 푸대접하는지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전감독이 전시를 기획해 나가면서 나름대로 조직을 장악했더라면 지금처럼 서울사람과 광주사람,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의 대결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런 점에서 최전감독의 가장 큰 실수는 지난 두차례 비엔날레를 겪은 사람들의 조언을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광주시로부터 권한과 책임을 확인한 뒤 총감독 취임을 수락했어야 했다는 것이다(총감독의 권한은 유감스럽게도 최전감독 위촉 때까지도 명문화되지 않았다).

어쨌든 문제는 광주비엔날레의 미래다. 이미 사무총장(행정부시장 겸직)과 사무차장(광주시립미술관장) 주도 하에 새로운 스태프가 꾸려지고 있으므로 어떻게든 비엔날레는 열릴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미술인들이 비엔날레에 의도적으로 '무관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광주비엔날레는 비틀린 문화정책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 될 것이다.

김 민 경 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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