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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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평문씨 萬卷堂
2만권 古書 수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남평문씨들의 문중문고인 ‘인수문고’는 8500책(2만권 분량)을 수장, 민간으로서는 고서를 가장 많이 갖고 있다. 전국의 문인, 달사들이 이곳에 찾아와 책을 열람하고 학문을 논한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적선(積善)을 많이 하거나, 선(禪)을 하거나, 명당에 묘를 쓰거나, 독서를 많이 하면 된다는 게 그것이다. 이 가운데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가장 보편적인 방법을 꼽으라면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일 터다.

아무튼 독서를 많이 하면 나쁜 팔자를 좋은 팔자로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믿음이었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보다도 상대적으로 유가에서 독서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유교 선비는 책을 좋아한다. 아울러 독서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한국의 지적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 집안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경북 대구에 고서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집안이 하나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에 있는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이다.

인흥리에 세거하는 남평문씨들은 ‘인수문고(仁壽文庫)’라 불리는 특별한 문고를 가지고 있다. 인수문고는 문씨 집안 공동의 문고를 일컫는 이름인데, 이러한 형태의 문고를 통상 문중문고(門中文庫)라고 칭한다.

현대적 의미의 도서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 네 가지 유형의 도서관이 있었다. 첫째는 조선조 정조 때에 세워진 규장각과 같은 왕립도서관이고, 둘째는 성균관·향교·서원 등의 교육기관에 설치되었던 학교도서관이고, 셋째는 문중에서 자녀교육을 위해 설치한 문중문고이며, 넷째가 개인문고다. 이 가운데 문중문고는 그 성격이 특이하다. 특정 성씨의 구성원만을 위한 문고라는 점에서는 사적인 용도지만, 개인이 아닌 문중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문중문고는 공사(公私) 합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만권 보유하고 있는 인수문고

현재 인수문고가 소장한 장서는 대략 8500여 책에 달한다. 1975년 인수문고가 설립되기 전에 그 전신인 만권당(萬卷堂)과 수봉정사(壽峯精舍)에 소장되어 있던 6948책과 1975년 이후에 추가로 수집된 1500여 책을 합한 수치다.

보통 고서의 경우 1책(冊)이 2∼3권(卷) 분량이 되므로, 8500책을 권 단위로 환산하면 2만권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서원 가운데 가장 많은 장서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장서가 약 4400책이다. 그 양적인 측면만 가지고 따져본다면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보다 문씨들의 인수문고가 더 많은 장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의 국·공립 도서관 또는 대학도서관을 제외하고 인수문고가 민간으로서는 가장 많은 고서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인수문고의 8500여 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고대 중국에서는 고서의 내용을 분류할 때 ‘광내(廣內)’와 ‘승명(承明)’이라는 분류기준을 사용하였다. 광내는 주로 각종 경전들을 가리키고, 승명은 고금의 역사에 관한 책들이다.

또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의 좌측으로는 광내전(廣內殿)이라는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고, 우측으로는 승명전(承明殿)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좌통광내 우달승명(左通廣內 右達承明)’이다. 좌우통달(左右通達)이란 말 역시 여기서 유래한 것이며, 따라서 ‘통달’했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제가의 경전과 고금의 역사에 밝다는 뜻이다.

좌통광내 우달승명이라는 기준보다 더 확대되어 통용되던 분류기준은 사부(四部), 즉 경(經)·사(史)·자(子)·집(集)이었다. 경은 교과서 격에 해당하는 경전을 가리키며, 사는 역사에 관한 책이다. 자란 유(儒)·병(兵)·법(法)·도(道)·석(釋)의 각 가(家)와 기예(技藝)·술수(術數)·소설(小說)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집은 학자들의 개인문집을 가리킨다. 인수문고의 기반이 된 만권당에 소장된 6948책 가운데 경부(經部)는 536책이고, 사부(史部)는 1813책, 자부(子部)는 588책, 집부(集部)는 4011책이다.

인수문고의 전체적인 특징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이렇게 평가한다. “기호(畿湖) 본위로 모은 규장각 도서관, 이왕직 도서관, 한림서림 등의 서적 목록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상당수 볼 수 있다” “장서의 양뿐 아니라 어느 책도 낙질(落帙)이 없는 것이 특징” “우리나라 도서관사상 그 유례가 드문 문중문고”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러한 평가 외에도 필자가 덧붙이고 싶은 인수문고의 특징은 역사서를 유달리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부 1813책이라는 분량이 그 점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 2책)’ ‘고려사(高麗史, 70책)’ ‘여사제강(麗史提綱, 13책)’ ‘편찬려사(編纂麗史, 25책)’ ‘국조보감(國朝寶鑑, 28책)’ ‘해동역사(海東繹史, 6책)’ ‘한력대사략(韓歷代史略, 3책)’ ‘소화외사(小華外史, 6책)’를 비롯해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 2함16책)’ ‘한서(漢書, 30책)’ ‘후한서(後漢書, 2함16책)’ ‘진서(晋書, 3함20책)’ ‘송서(宋書, 2함16책)’ ‘남제서(南齊書, 1함6책)’ ‘요사(遼史, 2함12책)’ ‘금사(金史, 4함20책)’ ‘원사(元史, 8함40책)’ ‘명사(明史, 8함80책)’ 등을 망라하고 있다.

왜 이렇게 역사책을 많이 모아 놓았는가? 역사서는 인간사의 다양한 판례집과 같다. 판례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많이 알아야만 복잡한 상황에서 시비를 제대로 가릴 수 있고, 자기 처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역사책을 섭렵하면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고, 위기상황에서 욕먹지 않는 처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대체로 깐깐해서 불의를 보고 어물쩍 넘어가지 않는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수문고에 이처럼 유달리 역사책이 많이 수집되어 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투철한 역사의식을 요청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경기가 불황일 때 TV 사극을 많이 본다는 속설처럼, 시대가 혼돈 상황일 때 남다른 역사의식이 요청되는 법이다.

 

인수문고의 모태 만권당

인수문고의 기반이 된 만권당의 설립 시기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무렵이다. 나라가 망하던 시기에 세운 문고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고 하였던가, 나라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 있고 백성들은 그 산하에서 어찌되었던 살 수밖에 없다.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역사의식이 강한 사람은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벌판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결과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역사의식이 결여된 사람은 일제에 굴복하고 협력해서 그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런데 만주에 가서 총 들고 싸우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일제에 비굴하게 협력하기도 싫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인흥리의 남평문씨들은 그 방도로써 만권당을 세우지 않았나 싶다.

만권당의 일차적인 목적은 남평문씨들의 자녀교육이다. 일제의 한국 병탄 이후 신식 교육기관이 대거 설립되는 상황에서 문씨 집안에서는 일제가 세운 신식 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일본 사람이 세운 학교에 자식들을 보내면 결국 자식들은 일본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자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설립한 사립학교이자 도서관이 만권당인 셈이다.

학문을 제대로 하려면 책이 많아야 된다. 책을 널리 수집하자! 서울 대구 등지에서 수집한 만권당 책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고가의 책들이었다. 낱권이 아닌 전집으로 이루어진 책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떤 책을 구입하느냐 하는 문제는 수집가의 학문적 수준과 관심 분야에 따라 다르다. 서가에 꽂힌 책들의 종류와 명칭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 분야와 깊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만권당 장서 중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책들을 선별해준 인물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년)이다. 그는 구한말의 유학자요 문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소사(韓國小史)’ ‘한사계(韓史)’ 같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에 건너가서 살았는데, 남평문씨 집안과는 평소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중국 상해에서 머무를 때 만권당 주인의 부탁을 받고 이 책들을 추천해준 것이다. 중국에 망명해 있던 김택영이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역사 분야였던 것 같다. 인수문고에 역사책이 특히 많은 이유도 김택영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때문일 것이다.

김택영이 추천, 구입한 책들을 상해의 배편에 실어보내면 전남 목포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해에서 목포까지 왕래하는 선편이 있었던 모양이다. 배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받으면 문씨 집안에서는 사람을 목포에 보내서 책을 가져와야 했다.

변변한 도로가 없던 시절에 수백권의 책을 운반하는 일도 큰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라도 한쪽 끝인 목포에서 경상도 대구까지 서에서 동으로 횡단 운반하는 일은, 서울에서 대구로 운반하는 코스보다 몇 곱절 힘이 더 들었다고 한다. 한반도의 지형적 조건상 영호남 간에는 첩첩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88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음을 감안해두자.

당시 책을 운반하는 수단은 다름 아닌 소달구지였다. 수백권의 책을 실은 소달구지는 목포에서 출발하여 털털거리면서 일단 지리산 남원으로 왔고, 남원에서 다시 함양, 거창의 첩첩산길을 힘들게 넘어 대구 인흥리 남평문씨 만권당에 도착하였다. 당시 열악한 도로사정을 감안할 때 소달구지로 짐을 싣고 오는데 아무리 빨라도 보름은 너끈히 걸렸을 것 같다. 만권당의 책들은 이렇게 모아진 것이다. 엄청난 돈과 시간과 정력이 투자된 결과다.

 

인흥사 터에 자리잡아

이러한 작업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남평문씨 집안은 어떤 집안인가를 살펴볼 차례다. 만권당 설치는 돈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 자기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세상에서 복(福, 재물)과 혜(慧, 지혜)를 모두 갖추기가 어려운 법인데, 남평문씨들은 그런 복과 혜를 다 갖추었던 것같다.

인흥리에 사는 남평문씨들은 시조가 문다성(文多省)이다. 문다성은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장자못가에 솟은 천길 높이의 바위에서 태어났다는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남평면 풍촌리 장자못가에는 시조가 태어났다고 하는 바위인 ‘문암(文巖)’이 우뚝 솟아 있다. 본관인 남평 역시 문씨들이 나주의 남평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평 문씨의 중시조는 고려말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년)이다. 남평 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인 문세근(文世根) 때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00년 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로 옮긴 것이다.

대구에서 다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 현재의 남평문씨 세거지에 들어와 터를 잡은 것은 문익점의 18세손이자, 문세근의 9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 1812∼1874년) 때부터다. 160년 전인 1840년대 전후에 인흥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흥에 새롭게 터를 잡은 개기조(開基祖)는 문경호다. 입향(入鄕)이라 하지 않고 개기(開基)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1840년대 당시에 인흥 세거지에는 사람이 사는 동네가 없었고, 문경호가 들어오면서부터 처음으로 문씨들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흥은 조선후기 당시 폐사지였다. 원래 고려시대 인흥사(仁興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가 폐사가 된 상태였던 것이다. 인흥사는 고려시대 일연(一然)스님이 11년간이나 머물렀던 사찰이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여기서 작성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의 상당 부분과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인흥사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평문씨의 종손인 문정기(文定基)씨가 살고 있는 집터는 인흥사의 대웅전 자리라고 전해진다.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 이름이 고려정(高麗井)인데, 고려시대 인흥사 시절부터 사용되던 우물이다. 세거지 앞의 밭 가운데 있는 석탑도 인흥사 유물로 전해진다.

 

절터를 집터로 잡은 이유

사람이 살지 않는 인흥사 터에 평소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문경호가 적당한 시기가 되자 가솔들을 이끌고 와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절터를 집터로 바꾼 동네가 인흥인 것이다.

문경호는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이곳에 터를 잡은 배경에는 풍수적인 원리가 당연히 참작되었을 것이다. 자손 대대로 수백년 동안 거주할 세거지를 잡을 때 풍수를 보지 않고 무턱대고 잡을 리는 없다.

문경호는 인흥사 터의 어떤 부분에 끌렸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절터는 거의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100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다. 지세가 너무 허한 곳이나, 너무 강한 곳을 보강하거나 누르기 위해서 사찰을 세우는 수가 있다. 당연히 그런 비보사찰은 보편적인 명당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절터는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데 유리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바위가 많은 지형을 선호한다. 바위가 많은 곳은 지기(地氣)가 강해서 이른바 ‘기돗발’이 잘 통한다. 예를 들면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이나 도갑사가 있는 월출산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이런 곳에는 일반인들이 주택을 짓고 살기 어렵다.

반대로 절터를 명당이라고 간주하고 묘나 주택이 들어선 경우도 상당수 있다. 이런 절터는 주변 사격(청룡, 백호, 현무, 주작)을 살펴보면 살기가 별로 없는 온화한 곳이다. 주변에 바위산이 별로 없는 절터는 일반 주택이 들어서도 무방하다.

문경호가 평소에 주목하였던 인흥사 터는 필자가 보기에 절터 치고는 바위산이나 살기가 보이지 않는 온화한 장소다. 이렇게 온화한 폐사지는 조선중기 이후부터 거의 묘자리나 집터로 전환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군에 의해 많은 사찰들이 폐사된 상황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산세가 강한 경상도 지역보다도 산세가 부드러운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의 폐사지에서 그러한 전환이 훨씬 많이 이루어졌다.

경상도의 산세는 흔히 태산준령(泰山峻嶺)으로 일컬어진다. 대체적으로 산이 높고 기세가 강해 사람들의 성품도 그 산세를 닮아 선이 굵고 뚝심이 있다고 한다. 경상도 전체의 산세를 놓고 볼 때 태산준령에 부합되는 곳은 북쪽의 안동이나 상주보다는 대구쪽이 아닐까 싶다. 안동이나 상주는 산세가 높지 않고 비교적 부드러운 편인 반면 대구 근방은 산이 높아서 위압감을 주는 산세라고 보아야 한다.

대구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양대 산은 팔공산(八公山)과 비슬산(琵瑟山)이다. 팔공산과 비슬산 모두 1000m가 넘는 고산준령이고, 곳곳에 바위 절벽이 돌출되어 있는 호방한 국세를 지니고 있어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어지간한 역경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돌파하는 장군과 같은 기상을 머금고 있다.

특히 비슬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산이다. 비슬은 고대인도 힌두의 신인 비슈누(Visnu)를 한자로 음역한 표현이다. 비슬산은 신라시대까지는 줄곧 포산(苞山)이라 불려왔다. ‘삼국유사’에는 ‘포산이성조(苞山二聖條)’라고 해서 도성선사와 관기선사가 도통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무대가 바로 비슬산이다. 일연스님이 반평생을 보내면서 수도한 보당암, 무주암, 묘문암이 모두 비슬산에 있는 암자들이다. 일연 스님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산이 비슬산인 것이다.

인흥마을은 그 비슬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이 뭉친 곳이다. 비슬산이 대구쪽으로 흘러가다가 그 주맥의 중간쯤에 장단산(將壇山)이 솟았다. 장단산 옆에는 소조산(小祖山)인 까치봉이 서 있고, 그 까치봉에서 북서쪽으로 소맥이 하나 내려와서 금체(金體) 형태의 천수봉(千壽峰)으로 뭉쳐 있다. 천수봉 바로 밑에 인흥사가 있었고, 현재는 문씨들의 세거지가 자리잡고 있다.

좌향은 서남향의 간좌(艮坐,동북방향을 등진 자리)다. 간좌는 부자터가 많다. 까치봉에서 천수봉까지의 거리는 약 2km인데 비교적 부드러운 산세로 내려온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안산을 비롯한 주변 사격도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태조산(太祖山)인 비슬산이 강기(剛氣)를 품은 장군과 같은 기세인 반면, 인흥쪽으로 내려온 지맥들은 부드럽게 내려와서 그러한 강강한 기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지점에 터가 형성되었다. 외강내유(外剛內柔)라고나 할까. 외곽은 강한데 안은 부드럽다. 그 부드러움이 좋게 보인다. 그래서 선인들이 이곳 절터와 지명에 어질 인(仁) 자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14대조 묘까지 남아 있는 선산

이곳을 답사한 지관들의 말에 따르면 소조산인 까치봉에서 주산(主山)인 천수봉에 이르기까지 모든 봉우리들이 오행의 상생(相生)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까치봉의 끝이 삼각형처럼 뾰쪽한 목체(木體) 형태의 봉우리이고, 목생화(木生火)의 원리에 의해 불꽃같은 화체(火體)의 봉우리가 연결된다. 여기에 다시 화생토(火生土)의 원리에 의해 평평한 토체(土體)가 이어지고, 토생금(土生金)의 원리로 바가지같이 둥그런 금체(金體)가 이어지는 형국을 말한다. 까치봉에서 천수봉까지 이러한 모양의 작은 봉우리들이 연달아 이어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오행의 상생으로 이어진 형국을 아주 귀하게 본다. 이와 비슷한 형국이 전주에서도 발견된다.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에서 태조 이성계의 선산이 있는 조경단까지 이어지는 봉우리의 형태가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에는 안대를 보자. 안산은 260m 높이의 함박산으로 그 모양이 말안장의 형태다. 흔히 마체(馬體)라고 부른다. 안산이 마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 그 터에서는 벼슬하는 귀인이 나온다고 한다. 옛날에는 벼슬을 해야 말안장에 올라탄다고 여겼던 탓이다.

욕심을 내자면 안산 쪽에 문필봉이 하나 추가되어 있었으면 더 좋았을 성싶다. 문사(文士)가 살기에는 아무래도 문필봉이 더 끌리게 마련이다. 만약 이곳에 문필봉까지 있었더라면 이 터는 1840년대까지 빈터로 남아 있었을 리 없다. 그 전에 이미 다른 성씨들이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택에 문필봉이 없으면 음택에서 문필봉을 보강하면 된다. 한국의 풍수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양택보다 음택의 비중을 높게 본다. 양택은 그 터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영향을 받는다고 보지만, 음택은 핏줄을 이어받은 자손이면 누구나 다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음택이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가 더 넓다.

그러므로 음택에서 문필봉을 찾으면 된다. 필자는 이 집안의 선산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남평문씨 14대조 묘부터 시작해서 바로 윗대의 묘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산실되지 않고 모두 보존되어 있었다. 500년 전의 14대조부터 지금까지 이 집안의 묘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왕족이 아닌 민간에서 500년에 걸친 조상의 묘를 보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필자로서도 처음 듣는다. 이는 집안의 가통(家統)이 그만큼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조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물을 보자. 동네 앞을 흐르는 천내천(川內川)은 둥글게 돌아서 서북쪽으로 흘러 나간다. 천내천이 흘러서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었다. 수구(水口)는 서북방향(乾亥方)으로 물이 흘러나간다. 수구 너머 멀리 서북쪽으로는 낙동강이 보인다. 동네 어른들의 구전에 의하면 “멀리 보이는 낙동강 물이 보이지 않아야 동네에 좋다”고 한다. 그래서 서북방향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몇 그루 남아 있지 않지만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이 소나무들은 수구막이 용도로 심어 놓은 것이므로 반드시 보강할 필요가 있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겨울에 서북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춥기 때문에 이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낙동강 쪽에서 불어오는 서북방 바람은 강바람이라서 더욱 차갑다. 소나무숲은 차가운 강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정자(井字) 구도의 가옥 배치

인흥에 새롭게 터를 잡은 문경호는 이미 1000석 가까운 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재력을 바탕으로 인흥이 문씨들이 대대로 살 수 있는 세거지가 될 수 있도록 장기 마스터플랜을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그러한 마스터플랜을 세운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인흥은 처음부터 계획된 마을이란 점에서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먼저 우물 정자(井字) 형태로 가옥을 배치한 것이지 않나 싶다. 현재 인흥마을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은 모두 아홉 채인데, 마치 우물 정자처럼 가로 세로로 줄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형태다. 이처럼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가옥이 배치된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힘들다.

인흥의 문씨 세거지는 9채의 개인주택 외에 문씨들의 공공건물이라 할 수 있는 3채의 건물, 즉 광거당·수봉정사·인수문고가 있다. 그러니까 인흥에는 개인주택 9채, 공공건물 3채를 합해 모두 12채의 건물만이 존재한다. 앞으로 더 이상의 건물은 들어설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우선 동네터가 전체 2만평 규모라는 점 때문이다. 1만평은 12채의 건물이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1만평은 동네 마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만약 건물을 더 지으려면 동네 마당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동네가 건물로 빽빽해져 여유공간이 없어지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서 문중에서는 더이상 신축 건물을 허용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현재 9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이 살고 있다. 차남과 딸들은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한다. 장남 상속의 원칙이 현재에도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이는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부득이한 방법이라고 한다.

재산 중에서 인흥의 9채 주택만큼은 현행 법률과 상관없이 반드시 장남에게 상속하지만, 주택이 아닌 다른 부동산이나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에게도 공평하게 상속된다. 물론 장남은 집을 물려받았으므로 다른 재산 분배에서는 그만큼 제외된다.

장남이 대구 밖의 외지에 직장이 있을 경우는 밖에 나가서 살 수 있지만,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에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또 문중 내규에 의하여 외부인에게 집을 파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함부로 뜨내기가 들어와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마을이다.

동네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휴지나 빈 병, 쓰레기를 어디 하나 찾아볼 수 없다. 흙담으로 둘러싼 9채의 전통가옥에 전부 문씨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수시로 청소하고 관리하는 까닭이다. 종가집인 문정기씨 가옥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반듯한 흙담장, 잘 깎여진 마당의 잔디, 윤이 나는 현관 마루, 정감 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 옆의 채마밭이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듬어져 있다.

 

사극 영화 단골 촬영지

전통가옥에서 흔히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니는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집의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한옥만 있으면 누가 아파트에 살겠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법도를 지키고 있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1935년 동아일보에서는 전국에서 책이 많은 집을 소개하는 답사기를 연재한 바 있는데, 그 연재를 담당한 김태준(金台俊, ‘조선소설사’의 저자로 당시 문명을 날리던 인물)은 인흥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가 나면 수년 전 연희전문학교에 1만여 권 도서를 기증한 전남 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文章之, 壽峯 文永樸)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대구역에 내려서 화원행 버스를 잡아 탔다. … 화원에서 동으로 한 마장쯤 골짜기로 들어가면 소송독류(疎松禿柳)와 인산지수(仁山智水)가 말하지 않아도 처사(處士)의 집같이 엄숙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 모여 왔다. 장서가 문장지씨는 벌써 고인이 되고 그 자손 시채, 진채 제씨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전(石土塼)과 무림수죽(茂林脩竹)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

명사의 평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인흥의 문씨 집안은 조선의 문풍(文風)을 지키면서 장서가 많은 집으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10년에 광거당(廣居堂)이 설립되면서부터다. 광거당은 원래 재실(齋室)로 지어졌지만, 광거당 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萬卷堂)이 설치됨으로써 전국의 문인, 학자들이 방문하여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살롱이면서 도서관이었고, 거기다가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 문화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전국의 저명한 문인, 달사들이 소문을 듣고 방문하여 광거당 내에 비치된 만권의 책을 열람하기 위해 몇 달씩 머무르다 갔다. 그러한 자취가 광거당의 누마루 바깥에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이라고 걸려 있는 추사 글씨 현판에 남아 있다.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집’이라는 뜻의 이 현판은 당시 광거당을 다녀간 문사들의 고풍스런 정취와 격조가 묻어 있는 현판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묵은 이끼와 연못은 메워지고 없지만 뜰안의 대숲과 담장 밖의 수백년 된 소나무들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광거당의 문향(文香)을 전하고 있다.

광거당은 그 고풍스런 분위기로 인해서 1980년대 장미희가 주연한 영화 ‘황진이’의 촬영 무대로도 이용되었다. 이외에도 문씨 세거지 전체의 전통적인 분위기 때문에 강수연이 주연한 ‘씨받이’에서는 수봉정사와 문씨 종가인 문정기씨 집이 촬영 무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거당을 세우고 또 그 내부에 만권당을 설치해서 수많은 책을 중국에서까지 수집하고, 당대의 문인, 달사들을 초청해서 대접할 수 있으려면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재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만권당 설치한 수봉선생

개기조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 1854∼1923년)대에 이르러 불어난 재산이 뒷받침되었다. 문봉성은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부를 이루었다. 일찍이 한 역술인이 그의 관상을 보고 “나라의 큰 재목이 큰 부자에 그치고 마는구나” 하고 탄식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문봉성은 큰 부를 바탕으로 지금의 인흥마을 전역을 하나로 만들었으며, 거금을 들여 만 권의 서적을 구입하면서 광거당 내에서 7종의 문헌을 간행하는데 아낌없는 재정적 후원을 하였다. 그 후원이란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불서(佛書)를 간행하던 그 터에서 700년 후에 다시 유서(儒書)들을 간행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은 문봉성의 둘째아들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 1880∼1930년)이다. 문봉성의 큰아들인 영근(永根)은 일찍 요절하였고, 셋째아들 영환(永桓)은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둘째아들이 일을 한 것이다.

아버지 문봉성은 둘째아들인 영박이 하자고 하는 일은 무엇이든 다 후원하였다고 한다. 돈은 아버지가 대고 실제 일은 아들이 다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자간에 아주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만권당을 설치해야 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아들인 문영박이 처음 기안을 하였고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니까 문영박에 의하여 오늘날 남평문씨 세거지 모습이 완성되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동아일보의 김태준과 한학자 임창순이 거론한 ‘문장지(文章之)’와 ‘수봉선생’이라는 표현이 모두 문영박을 지칭하는 표현임을 볼 때, 수봉 문영박은 광거당을 중심으로 한 남평문씨 세거지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떨치게 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평 문씨 세거지의 가장 앞에 서 있는 건물은 수봉정사(壽峯精舍)인데, 이 건물은 문영박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봉 사후인 1936년에 세워진 기념건물이다. 수봉정사는 제2의 광거당이기도 하다.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서 천하의 좋은 사람을 다 사귀고 싶고, 천하의 좋은 책을 다 보고 싶다”는 선현들의 말처럼, 수봉은 책을 좋아하여 살림을 털어 고금에 걸쳐 1만 권의 책을 모았고 학자들과 문화인들을 좋아하였다.

조선 유학계의 군성(群星)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수십명의 선비가 항상 광거당에 묵으며 수봉과 더불어 학문과 고금을 논하고 시와 글을 짓고, 술잔을 나누며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그 무대가 된 광거당은 일반 사랑채가 아닌 재실(齋室)이라서 동네 한쪽에 별도로 떨어져 있는 건물이다. 사랑채 용도로 사용은 되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채는 아니다. 재실이면서,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영빈관에다가 도서관 성격이 복합된 건물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용도의 건물이다. 이러한 성격의 건물은 현재 호남지역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광거당에 잠을 잘 수 있는 시설은 되어 있지만 식당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광거당에는 문간채가 있지만 이 문간채에는 손님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사는 공간이라서 외부에서 온 귀빈 식사는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통 사랑채 같았으면 바로 옆의 안채에서 식사를 나르면 되는데 광거당은 어떠했을까. 살림채와 100m 이상 멀리 떨어진 독립건물이어서 손님들이 오면 그때마다 밥과 반찬을 일일이 날라야 했다고 한다. 하인들이 밥상, 밥, 반찬, 국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혹시 비가 오는 날이면 밥상보를 덮어서 나르기도 하였다. 오늘날 생각하면 그 시절의 손님대접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듯싶다.

 

상해 임시정부가 보낸 조문

수봉과 깊은 교류를 하였던 인물 가운데 눈에 띄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창강(滄江) 김택영 (金澤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이정(彛庭) 변정상(卞鼎相)과의 교유다. 종횡으로 얽힌 이들의 교유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심재는 영남지방의 산림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다. 한때는 광거당에 머물면서 수봉의 자식들과 조카들을 가르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심재는 또한 수봉과 함께 매천 황현, 창강 김택영과도 친해서 이 네 사람 사이에는 편지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김택영은 다시 난곡 이건방과 이정 변정상과 친하였다. 수봉이 이건방, 변정상과 친해지게 된 것은 중간에서 창강이 연결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김택영은 강화학파(江華學派)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김택영은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이자 강화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이건창(李建昌, 1852∼1898년)과 무려 30년간 친교를 나누었다.

근세 개화기 무렵의 강화학파는 행동하는 양심이라 일컬어질 만큼 실천적이었다. 이건창도 부패한 벼슬길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강화도에 은거하였고, 강화학파로서 이건창과 집안간인 이건승(李建昇) 역시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독하게 죽었다. 이건승을 비롯한 강화학파 멤버들은 일제강점기를 수용할 수 없었다.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만주로 갔던 것이다. 연세대 민영규(閔泳珪) 교수가 강화학파의 궤적을 다룬 ‘강화학 최후의 광경’(1994년)이란 책을 보면 이 시기 강화학파는 대부분 눈보라치는 만주로 가서 풍찬노숙 하다가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나온다.

자결한 매천 황현도 이건창을 비롯한 강화학파와 심교(心交)를 맺은 사이다. 매천은 자결하기 1년 전에 구례에서 서울까지 천리길을 걸어가 이건창의 무덤을 참배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난곡 이건방 역시 강화학파의 핵심멤버로서 만주에서 죽은 이건승과는 집안 동생의 관계이기도 하다.

강화학파 중 이건방이 유일하게 만주에 가지 않고 국내에 남아 목숨을 유지한 인물인데, 민영규 교수에 의하면 이는 누군가 한사람은 조선에 남아서 강화학파의 맥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며, 그 마지막 맥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후일 위당 정인보가 수봉의 사후에 그 묘갈명(墓碣銘)을 지어준 것도 생전에 스승인 이건방과 수봉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수봉은 조긍섭과 김택영을 매개로 하여 강화학파와 사상적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광거당의 주인 수봉이 영남의 남인 학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경술국치라는 난세를 당하여 당시 가장 양심적이고 실천적인 강화학파와 학파를 초월하여 의기(義氣)를 공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만권당 설립도 강화학파의 그 실천적 양심에 동조하여 나온 산물이라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수봉이 사망한 후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발행으로 비단천에다가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追弔文)과 특발문(特發文)을 고인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고 싶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인 조문을 보냈다는 것은 수봉이 임시정부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1931년에 보낸 이 조문은 고인이 임시정부에 상당한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현재 가로 15cm 세로 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 한자로 인쇄된 ‘대한국춘추주옹’이라는 임시정부의 조문은 문씨 집안에서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인수문고의 지킴이 문태갑씨

인수문고는 현재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의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보관되고 있다. 인수문고 옆에는 1993년에 또 하나의 문고가 추가되었다. 바로 ‘중곡문고(中谷文庫)’다.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72)씨가 설치한 것이다.

문태갑씨는 관료 생활과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인수문고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이 수십년 동안 수집한 책 5000권을 모아 중곡문고를 설립했다. 인수문고가 고서 위주인 반면 중곡문고는 요즘의 책들 위주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인 1995년 서울에서 인흥으로 내려와 인수문고의 청지기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가 넘었지만 눈빛과 목소리가 여전히 카랑카랑하다. 그는 청지기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인수문고 옆에 ‘거경서사(居敬書舍)’라는 이름으로 방 2칸짜리 자그마한 독서실을 지어놓고 여기서 주로 생활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읽는 방’이라는 뜻이다. 화려했던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시골에 돌아와 생활하는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니 관료나 정치인보다는 학자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친께서도 일찍이 저에게 학문을 하기를 원하셨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제가 만약 학자의 삶을 살았다면 말년이 아닌 젊었을 때부터 조상들이 남긴 만권당의 책들을 보면서 살았을 겁니다. 관료나 정치인으로 부산하게 사는 인생보다는 책을 보면서 사는 삶이 더 의미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집안에서 전통서당 교육을 고수하고 신학문을 못하게 하였다는데 어떻게 대학을 다닐 수 있었습니까?

“조부님이 1930년에 돌아가시면서 그 지침이 해제되었다고나 할까요. 제 윗대 형님들만 해도 조부님의 방침에 의해 신학문은 할 수 없었지요. 조부님이 오래 생존해 계셨더라면 아마 저희 연배들도 신식학교를 가지 못했을 겁니다. 신학교에 가게 된 것은 저희 연배들이 집안에서 처음입니다.”

―요즘도 인수문고의 고서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나요?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광거당도 개방하고 있습니다. 학술세미나 장소로 광거당을 요청하면 언제라도 저희 집안에서는 협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수문고를 장기간 열람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거경서사 이용도 개방해 놓고 있습니다.”

인수문고의 마당에는 녹색 잔디가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그 녹색의 잔디 위에서 원목으로 된 나무의자에 앉아 고서를 뒤적이고 있는 문태갑씨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과연 인생의 말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의미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인흥 토박이 문희갑 대구시장

당나라 때 중국의 관료들은 관청에서 퇴근해서 부인, 자식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곧바로 서재로 들어갔다고 한다. 가장이 한번 서재로 들어가면 누구도 그 독서를 방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년퇴직을 하면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이제사 마음대로 실컷 읽을 수 있겠구나”하면서 더욱 독서에 몰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말년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여행보다는 뜰앞에 의자를 내다놓고 책 읽으면서 사는 삶이 한층 고준하게 보인다.

수봉의 손자 가운데 또 한 사람이 현 대구시장으로 있는 문희갑(文喜甲·64)씨다. 문태갑씨의 사촌동생이기도 한 문시장은 인흥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기를 보낸 만큼 인흥에 대한 추억이 많다.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점이 부담이 될 때는 없습니까?

“부담이 될 때도 있습니다. 내가 혹시 잘못해서 욕을 먹으면 문씨 집안 전체에 누가 될까봐 걱정됩니다.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 울화가 치밀 때마다 저는 사무실에 걸려 있는 인흥 광거당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합니다. 고향의 모습과 선조들의 가르침은 저에게 큰 위로와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문시장은 경제관료 출신이면서도 평소 문화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으로 소문나 있다. 문시장과 인터뷰 도중에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경제관료 출신이라서 사람들이 저를 보면 으레 경제문제만 물어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게 불만입니다. 경제보다는 문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것이 경제가 목적이 아닙니다. 더욱더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경제가 방편상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최종 목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문화가 중요합니다. 문화를 생각하다보니 환경도 중요하더군요.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흥마을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구 섬유사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밀라노 프로젝트’ 때문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주 대구를 방문합니다. 언젠가는 전통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탈리아 사람들을 인흥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이 환경이었어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세거지 주변에 널려 있는 비닐하우스가 전통가옥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는 겁니다. 비닐하우스를 철거하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더군요. 주변에 비닐하우스가 없었으면 훨씬 품위있는 마을이 될 겁니다. 그러나 비닐하우스는 사람들의 생업이 걸려 있어서 쉽게 철거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문화재를 지정하려면 그 집만 달랑 지정할 일이 아니고, 주변환경 전체를 포함해서 지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걸 보더라도 환경을 보호하지 않으면 문화도 보존하지 못한다는 이치가 드러납니다.”

문시장의 이러한 철학은 유년시절부터 전통적인 가풍이 보존된 집안에서 성장한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나 싶다.

우리 사회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후의 혼란, 다시 6·25의 폐허를 거쳐야만 했고, 1970∼80년대 산업화를 겪으면서 모든 전통이 급격하게 사라지고 퇴색해 버렸다. 어딜 가나 옛것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없다. 그런 혼란을 똑같이 겪었으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조선 선비의 가풍을 지금까지 우직하게 보존하고 있는 남평문씨들의 고집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문씨들의 그 우직함과 고집은 정녕 태산준령인 비슬산의 정기에서 유래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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