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일제는 1919년 3·1독립운동에 큰 충격을 받고 ‘문화정치’를 표방해 이듬해
1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3개지를 허가했다. 당시 사이토 조선총독은 이에 대해 일본인들이 항의하자 “동아일보는 조선 민족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배출시키는 굴뚝이야. 가스를 배출시키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 끝내는 폭발하게 되거든...”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인촌 김성수 선생 등 창간 주도 인사들은 당초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자로 창간하려 했으나 자금부족으로 한달 후인 4월 1일 타블로이드판 석간 4면 체제로 창간했다. 당시 발행부수는 1만 부 정도, 구독료는 한 부에
3전(지금의 약 900원)이었다.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사시(社是)로 내걸었다. 이 창간정신은 지금도 본보 1면 좌측 상단에 동아일보 로고와 함께 고정 배치되고 있다.
최초의 사옥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대한제국 학부대신 이용태의 기와집을 월세 120원(1원은 지금의 약 3만 원)에 임대해 첫 사옥으로 사용했다. 사장실과 서고만 별실로 마련하고 그 밖의 부서는 한 방에 합친 옹색한 규모였다. 사장, 편집감독, 주간 이외에 논설반 및 편집국 22명, 영업국 17명, 공장 22명, 잡무 9명 등 총 74명에 지국망은 전국 5개 도시에 설치했다.
봉급은 주간 120원, 국장 100원, 부장과 논설반 70~80원, 기자 60~80원 등이었고 기자에게는 월 125원의 취재비가 별도로 지급됐다. 당시 한 달 여관비가 20~25원 정도였으니 꽤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화문 시대 개막
1926년 12월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 지상 3층짜리 사옥을 완공해 창간 6년 반 만에 광화문 시대를 열었다. 이 건물은 그 후 3개 층이 증축돼 충정로 사옥 입주 이전까지 동아일보 사옥으로 쓰다가 현재는 일민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충정로 사옥에는 1992년 이사해 이듬해 조간화에 이어 전면 가로쓰기, 컴퓨터제작시스템(CTS) 구축 등 신문사(新聞史)에 남을 큰 변화를 맞았다. 현재의 사옥 동아미디어센터에는 1999년 12월 31일 입주해 21세기와 함께 제2의 광화문 시대를 열었다.
세종로 네거리는 창간 당시부터 현재까지 변함없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즉 조선총독부와 군정청, 경무대, 청와대에 이르는 최고의 권부(權府)를 육안으로 가까이 볼 수 있는 거리에 두고 있어 권력을 감시 비판 견제하는 언론의 역할과 맞아떨어진다. 그런 이유로 인촌 선생이 굳이 이곳을 고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다양한 문화 체육행사 주최
본보는 1931년 제1회 동아마라톤대회 이래 74년간 이 대회를 개최해 오며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등으로 이어지는 ‘마라톤 한국’의 토양을 마련했다. 손 선수는 양정고보 시절 2회 대회 때 준우승하고 3회 대회 때 우승했다.
이 밖에도 1923년 7월 여자정구대회, 1924년 10월 학생웅변대회, 1925년 동아신춘문예, 1926년 8월 4구락부(배재, 중앙, 휘문, 경신) 야구연맹전, 1929년 9월 수영경기대회 및 남녀학생작품전람회 등 각종 연례 스포츠와 교육문화 행사를 주최했다.
특히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사람 조선 것 쓰기운동), 1931년 브나로드 운동(문맹퇴치운동) 등 대대적인 민족주의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에는 1947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쟁패전, 1956년 바둑 국수전, 1961년 동아음악콩쿠르, 1962년 명창명인대회, 1964년 동아연극대회, 1985년 동아국악콩쿠르 등을 마련해 다양한 분야의 발전에 기여했다.
일장기 말소사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 2로 당시 대망의 2시간 30분 벽을 깨고 우승한 손기정 선수는 전세계에 한국인의 기상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본보에도 큰 파장을 불러왔다. 손 선수가 시상대에 서 있는 장면 사진을 1936년 8월 25일자에 게재하면서 가슴 부분의 일장기를 지워버려 총독부로부터 네 번째 무기정간 조치를 당했다.
이는 당시 이길용 체육부 기자와 이상범 화백의 ‘이심전심’이 이뤄낸 작품이었다. 이 사건으로 본보 기자 8명이 구속되고 이중 5명은 끝내 신문계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주필 편집국장 등도 사임했다. 정간은 1936년 8월 29일부터 1937년 5월 31일까지 9개월간 지속되고 그 사이 송진우 사장, 장덕수 부사장, 양원모 사장직무대리 등도 잇따라 물러나야 했다.
폐간과 복간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 민족의 ‘황민화(皇民化)’를 기치로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에 광분해 제거 대상 1호로 본보를 지목했다. 총독부는 자진폐간 종용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계속 발행하자 구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40년 6월 초 일본인 경찰 간부들이 요정에서 회식 중 요리상을 덮은 흰색 종이가 본보에서 파지를 구입한 것이란 말을 듣고는 ‘경리부정’ 사건을 조작해 낸다. 당시 신문용지는 전시(戰時) 통제물자로서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를 불법 처분했다는 구실로 본사 경리부장을 구속했다. 또 보성전문학교에 2만 원을 빌려준 사실도 문제삼아 상무와 영업국장 등에 이어 송진우 고문과 백관수 사장까지 구속하고 말았다.
결국 본보는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그해 8월 10일자 사설을 통해 폐간을 선언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폐간호 3면 상단에 탐스러운 포도송이 사진을 게재해 전 사원이 다시 뭉칠 날이 있을 것임을 독자들에게 기약한다. 그로부터 암흑시대 5년 4개월이 지나고 광복 3개월 반 만인 1945년 12월 1일에야 복간됐다.
6·25전쟁과 부산 피란
남침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 아침 비상 소집된 본보 사원들은 시시각각 들려오는 전황에 따라 호외를 발행하다 27일 오후 남침 선봉대가 이미 의정부를 거쳐 미아리 부근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에 제작 중단 결단을 내린다. 편집국에 모인 기자와 인쇄직원들은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중’이라는 제목의 호외 300장을 마지막으로 발행하고 서울 시내 일원에 직접 배포한 뒤 무교동 설렁탕집으로 모였다.
신문사 가운데 최후의 호외를 낸 기자정신을 자축하는 술잔도 잠깐, 이들은 재회를 기약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후 본보는 국군과 유엔군의 진퇴에 따라 피란지 부산을 오르내리며 지역신문에 ‘구걸 인쇄’도 마다하지 않고 신문 제작을 계속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 발췌개헌안을 둘러싼 정치파동 때는 이승만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비판의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본보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8월 18일자를 끝으로 부산 피란시대의 막을 내리고 광화문 사옥으로 돌아왔다.
‘고바우 영감’ 필화와 ‘나대로 선생’ 난산
1955년 2월 1일자부터 연재된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은 1958년 1월 23일자 ‘경무대에서 똥 치는 인부’로 경무대의 위세를 풍자해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당시 권력자에게 무조건 아부하는 풍조를 반영한 것으로, 이 만화의 배경은 이강석(이기붕의 아들로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을 사칭해 지방 관리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 ‘가짜 이강석’사건이었다. 김 화백은 경찰에 연행돼 ‘타인의 사사(私事)에 관하여 허위사실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경범’으로 몰려 450환의 과료를 낸 뒤 풀려났다.
1980년 11월 11일부터 김 화백의 뒤를 이어 ‘나대로 선생’을 그려온 이홍우 화백 역시 첫 호부터 계엄령하의 군 검열로 난산을 거듭했다. 그는 정보기관에 의한 수차례의 연행조사와 협박, 회유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4컷 만화로 권력세계를 예리하게 풍자해왔다.
4·19혁명의 견인차
1959년 4월 30일 경향신문이 폐간되자 본보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획책을 간파하고 줄기찬 반정부 투쟁을 벌여 4·19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5월 2일자에 ‘왜 신문을 폐간시켰는가’ 제하의 사설로 포문을 열어 경향신문 폐간의 부당성부터 조목조목 지적했다. 엄청난 부정선거 계획이 노골화되자 1960년 3·15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선 학생과 시민들이 연일 시위를 벌였다. 본보는 다시 3월 11일자 ‘천인이 공노할 만행’ 제하의 사설에서 “가능한 한 모든 투쟁을 전국민의 이름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고 사실상 정권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했다.
3·15선거가 공포분위기와 공개투표, 테러 등에 의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지자 전국적인 항의데모 속에 마산에서는 군중이 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4월 11일 경찰의 무참한 학살로 밝혀진 김주열 군 사망사건은 마산을 폭발시키고 4월 19일 서울에서는 10만 명의 대학생과 수만 명의 중고교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경무대 앞까지 몰려가 경찰과 대치하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동시에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결국 이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이기붕 일가는 집단자살로 이승만 정권의 종언을 고했다.
언론 목 조른 5·16군사정변
5·16군사정변 세력은 5월 27일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대체하면서 형식상 사전검열은 없앴지만 언론에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재갈을 물렸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정부를 비방할 목적의 허위사실 날조 유포행위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고, 반공법에 ‘반국가단체와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1960년대 대부분의 필화사건은 이들 조항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이는 기자들에게 사실상 기자실과 화장실의 출입만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본보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조속한 민정 이양’을 요구한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군사정권과 첫 충돌을 했다. 이로 인해 당시 편집국장, 정경부 차장과 이만섭(전 국회의장) 이진희(전 문공부 장관) 기자가 연행돼 두 기자는 한달 이상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기자들이 빈번하게 연행되고 구속됐다.
5·16군사정권은 당시 조석간제이던 신문발행을 단간제로 바꿀 것도 강요했다. “정치 기사가 너무 많아 국민이 정치에 지나치게 민감하며 이에 따라 신문이 재미없어 독자가 늘지 않는다”는 명분이었다. 본보는 이때 석간을 선택했다.
동아방송 개국과 폐국
4·19혁명 이듬해인 1961년 1월 16일 민주당 정부에 의해 방송국(콜 사인 HLKJ) 설립 가허가를 받은 지 2년 3개월 만인 1963년 4월 25일 오전 5시 30분 3개월 만인(DBS)은 첫 뉴스 보도로 탄생을 알렸다.
관영방송인 KBS와 민영방송인 MBC, CBS에 이은 것이지만 3개월 만인은 일간신문사가 운영하는 첫 방송으로서, 청취율은 그해 7월 18.9%(공보부 조사), 그해 9월 20%(연세대 조사), 이듬해 2월 33.5%(공보부 조사)로 급성장했다. 더욱이 동아방송은 수도권 일대에서만 청취가 가능했던 점을 감안하면 전국 방송인 KBS의 39.8%를 압도하는 수도권 청취율 50%에 이르렀다.
동아방송은 특히 뉴스에 중점을 두어 동아일보가 ‘보는 신문’이었다면 동아방송은 ‘듣는 신문’으로서 보완관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아방송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11월 30일 마지막 방송을 함으로써 17년의 짧은 일생을 마감했다.
기자들에 잇단 정치테러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상과 협정비준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독주를 앞장 서 비판하고 반대하던 본보의 변영권 편집국장 대리의 자택이 1965년 9월 7일 밤 폭파되고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이 집에서 괴한에게 납치돼 몰매를 맞았다. 이어 당국은 10월 1일자 본보 사회면 ‘서울에 북괴 신문’ 제하의 기사를 문제 삼아 남중구 사회부 기자를 반공법 위반(찬양 고무) 혐의로 구속했다.
이듬해인 1966년 3월 24일 ‘독주(獨走)’시리즈 세 번째 기사인 ‘소신은 만능인가’를 쓴 최영철 정치부 기자가 4월 25일 밤 자택 부근 골목길에서 폭행을 당했고 이튿날 새벽에는 ‘구국특공단장’ 명의의 협박장과 함께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 2개가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7월 20일 밤에는 권오기 정치부 차장이 집 앞에서 2명의 괴한에게 폭행당하고 12월 29일에는 상이군경 50여 명이 본사 편집국에 난입해 집단 난동을 부렸다.
‘維新’ 저항과 광고탄압
영구집권의 바탕을 마련한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운동이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 2호 선포로 금지됐다가 8월 23일 해제되면서 대학과 종교계 재야단체 야당을 중심으로 유신헌법의 폐지, 민주회복 운동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 와중에서 그해 10월 23일자 본보에 ‘서울 농대생 300명 데모’기사가 보도되자 중앙정보부는 당시 편집국장 송건호, 지방부장 한우석, 동아방송 뉴스 쇼 담당 부장 박중길을 연행했다.
기자들은 즉각 편집국에 모여 농성에 돌입해 이튿날 ‘외부 간섭 강력 배제’ ‘기관원 출입금지’ ‘언론인의 불법연행 거부’ 등 3개항의 결의내용을 담은 자유언론실천 선언문을 발표했다. 10월 25일자에는 ‘왜 자유언론을 부르짖는가’ 제하의 사설을 실었다. 이후 본보는 금기사항(긴급조치 위반)이던 유신반대 집회 시위 기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해 하루 평균 7~10개의 대학가 시위 기사를 실었다.
이와 관련해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그해 11월 20일 언론통제에 맞서 투쟁하는 본사에 표창장을 보내 찬양했다. 급기야 그해 12월 16일경부터 정권의 압력을 받은 광고주들이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광고를 해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광고탄압 한 달 후 본보 광고는 98%가 떨어져 나갔다.
백지 광고가 나오기 시작하자 1만 건이 넘는 국내외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줄을 이었다. 돼지저금통을 털어온 어린이, 취로장 하루 노임을 몽땅 내놓은 노동자, 끼고 있던 금반지를 흔쾌히 빼준 독자도 있었다. 광고는 이듬해 7월 16일부터 재개됐다.
10·26사태 잉태한 YH여공 농성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 야당’을 내세운 김영삼 씨가 새 총재로 선출되면서 유신 정국은 암운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8월 9일 YH무역 여공 170여 명이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 4층 강당을 점거하고 노사분규 문제로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은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자 이틀 뒤인 8월 11일 심야에 기습 연행작전을 감행했으며 이 와중에서 여공 1명이 투신 자살하고 신민당 의원들과 취재기자들도 함께 부상 또는 연행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본보는 유신 말기의 단말마적인 정부 압력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경찰의 해산 작전을 대서 특필해 정국은 일시에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성을 잃은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 내부와 법원, 국회를 조종해 8월 11일 김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10월 4일 의원직 제명을 강행했다. 드디어 10월 22일 부산 마산 일원에서 폭발한 부마(釜馬)항쟁은 정권의 내분과 10·26사태를 부르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신정권 붕괴 과정에서 본보는 고비고비마다 다른 언론사를 훨씬 능가하는 취재와 비판으로 정국 상황을 주도해 나갔다.
광주민주화운동과 동아일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후 19~23일 초기 5일 동안 본보는 무사설(無社說)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울시청에 설치된 군(軍) 언론검열단은 첫날부터 사설을 ‘토막시체’로 만들어 돌려보냈다. 토막난 채로는 논리가 구성되지 않아 사설로 게재할 수 없었다. 다음 날에도 표현만을 조금씩 바꿔 비슷한 내용의 사설을 실으려 했지만 검열단은 여지없이 빨간 줄을 그어댔다.
1면 만평인 ‘동아희평’(백인수 화백)과 사회면 시사만화인 ‘고바우영감’(김성환 화백)도 실리지 않은 날이 많았다. 5월 27일 진압이 끝날 때까지 일요일을 제외한 13일 동안 동아희평은 11일간, 고바우영감은 8일간 지면에서 사라졌다. 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대법원 판결을 앞둔 어느 날에는 ‘김씨는 사형이 마땅하다’는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의 글을 싣도록 압력을 받은 일도 있었으나 본보는 “재판 계류 중이어서 곤란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광주민주화운동 초기 광주 전남 지역에서는 본보 기자만이 시위대에 접근해 취재가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언론사 기자 중에 본보 기자를 사칭하는 경우가 많아 이 일대에는 난데없이 ‘동아일보 기자’가 들끓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연속 특종
1987년 1월 15일 이 사건 첫 보도는 중앙일보에 빼앗겼지만 그 다음부터는 본보의 연속 특종보도로 6월민주항쟁을 촉발하는 원인이 됐다. 요지부동이던 전두환 정권의 ‘호헌(護憲)’입장은 드디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약속으로 바뀌어 6·29선언이 탄생하게 됐다.
사건 초기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은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쇼크로 숨졌다며 "조사 경찰관이 책상을 ‘탁’ 치니 박 군이 ‘억’하고 쓰러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본보는 박 군 삼촌의 증언을 통해 수십 군데 멍자국이 있었음을 밝혀낸 데 이어 최초 부검의사의 증언에 의해 물고문 등 각종 고문 의혹을 제기했다.
고문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내무장관과 치안본부장이 해임되고 가담 경찰관 5명이 구속됐으나 본보는 다시 대공수사 간부들의 범인 축소 및 사건은폐조작 모의 사실을 폭로했다.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정부는 노신영 총리와 안기부장, 내무 법무장관, 검찰총장, 안기부 1차장, 치안본부장 등 시국 관련 내각을 전면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보는 이에 그치지 않고 “사건 초기 치안본부장 등 경찰 수뇌부가 고문 치사 사실을 알고도 이를 은폐 조작했다”는 부검의사의 일기장 내용을 폭로해 해임에 그쳤던 치안본부장까지 구속되게 만들었다. 본보는 당시 서울시내 가판 판매에서만 40만 부를 넘기는 놀라운 신기록을 세웠다.
창간 78년 만에 전면 가로쓰기 단행
본보는 창간 73주년을 맞은 1993년 4월 1일 석간시대 30년을 마감하고 조간으로 새 출발을 했다. 조간화 단행 6개월 만에 발행부수 200만 부를 돌파해 1984년 150만 부를 기록해 한국 신문사상 신기원을 이룩한 이후 9년 6개월 만에 다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조간화 5년 만인 1998년 1월 1일 신년호부터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첫날 발행면수는 48면으로, 3개 섹션으로 나눈 새 얼굴을 선보였다.
기자 3명 순직
본보는 창간 이후 특별취재를 위해 해외에 파견한 기자 3명을 잃었다.
1920년 10월 중순 일본군이 북간도 일대의 조선인 2200여 명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덕준 기자가 자원해 룽징(龍井)으로 가 일본영사관과 토벌군사령부를 상대로 취재를 벌이다가 투숙 중이던 여관에서 11월 초 행방불명됐다. 당시 여러 정황과 현지인, 가족 등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이 그를 유인해 총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신문사상 최초의 순직기자로 기록됐다.
또 백광남 기자가 1966년 11월 베트남전쟁에 종군기자로 파견돼 취재 중 교통사고로 순직했으며, 이중현 사진기자가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순방을 수행 취재 중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 3명의 사진은 현재 본보 편집국에 나란히 걸려 24시간 본보 기자들의 신문제작 활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21세기의 영광’ 펼칠 동아미디어센터
언론의 사명을 상징하는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 21세기를 맞으며 21층짜리 인텔리전트 빌딩이 새로 들어섰다. 21세기 ‘동아의 웅비’를 예견하듯 동아미디어센터와 기존 사옥 옥상에 설치된 국내 최대의 전광판은 2002년 월드컵대회 기간 중 세계적 명물로 떠올랐다.
세종로 사거리 일대엔 한국팀의 경기가 있는 날마다 수백만 명의 ‘붉은 악마’ 응원단이 몰려와 "대~한민국"을 외침으로써 월드컵 4강 달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본사는 폭죽 터뜨리기 등 다양한 이벤트로 군중의 열광적인 응원을 지원해 찬사를 받았다.
2000년 12월 15일에는 동아미디어센터에 한국 최초의, 그리고 현재 유일한 신문박물관이 들어서 우리나라 근현대 언론사 및 헌정사를 보여 주는 산 교육장으로 정착됐다.
청계천과 함께 ‘독자에 더 가까이’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동아미디어센터 앞에 조성된 분수대 광장은 청계천 시발점임과 동시에 ‘동아광장’으로서 본보가 독자들에게 성큼 다가서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74년 전통의 동아마라톤 겸 서울국제마라톤의 코스도 청계천변을 따라 뛰는 새로운 코스로 변경되고 동아일보의 역사는 독자와 함께 새롭게 만들어 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청계천 시대에도 본보는 흔들림 없는 정론지로서, 독자의 생각과 목소리를 더욱 충실하고 정확하게 대변하는 믿음직한 친구가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독자들을 더욱 행복하고 살맛나는 세상으로 초대하는 꿈을 펼쳐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