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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안중근 의사 거쳐 간 블라디보스토크역

이준 열사-안중근 의사 거쳐 간 블라디보스토크역

Posted January. 18, 2020 08:50   

Updated January. 18, 202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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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의 중앙혁명광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한국인들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1893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구간이 개통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 역은 세계 최장의 시베리아횡단열차(9334km)의 종착지로 유명하다. 또 연해주와 만주를 무대로 독립전쟁을 펼치던 항일투사들이 수시로 이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인연의 시작은 1907년. 헤이그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 역사를 찾았다. ‘을사늑약(1905년)의 부당함과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라’는 고종 황제의 밀명과 밀지를 가슴에 품은 이상설과 이준은 그해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보름 만인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한 특사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도 이 역을 이용했다. 안중근은 그해 2월 7일(음력) 러시아령 한인 초기 정착지인 연추 하리(下里)에서 동지 12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혈서(血書)를 쓴 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정착지인 개척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개척리 한인사회 지도자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브라우닝 권총을 구해주는 등 거사를 지원했다. 마침내 10월 21일 오전 8시 50분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과 함께 권총을 가슴에 품고 거사를 실행했다. 이 밖에도 많은 무명의 독립투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사의 마지막 장면도 이 역에서 펼쳐졌다. 1937년 스탈린이 실시한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기차를 탄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중앙혁명광장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이라면,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한인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안영배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