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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획이 상팔자다

Posted October. 25, 2019 07:42   

Updated October. 25, 2019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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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400만 관객을 넘은 지독하게 불편한 영화 ‘조커’는 배트맨 시리즈 중 최고 수작 ‘다크 나이트’(2008년)에 등장하는 전대미문의 악당 조커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外傳)이다. 고담시의 광대 아서 플렉이 사회의 냉대와 억압 속에서 소외된 자들의 왕인 조커로 탄생하는 과정을 담는다. 조커의 존재를 두고 영화광 독자가 보내오신 질문 중 2개를 뽑아 답변드린다.

 Q.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조커’의 조커 중 어느 놈이 더 나쁜 놈인지요?

 A.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연쇄살인마 ‘까불이’의 정체가 누구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질문이군요. 똑같은 놈의 탄생기(‘조커’)와 전성기(‘다크 나이트’) 중 어느 놈이 더 나쁜 놈이냔 얘기군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까요? ‘어느 놈이 더 미친놈일까.’

  ‘조커’의 주인공 아서는 진짜 미친놈은 아닙니다. 왜냐? 미친 짓을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조커’의 조커는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아주 논리적인 놈이란 얘깁니다. 생각해 보세요. 조커는 원래 돈 없고 ‘백’ 없는 전형적인 사회적 소수자였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신체적 학대와 소외를 자양분 삼아 괴물로 쑥쑥 자라나죠. 어릴 적 엄마의 애인으로부터 극한의 폭력을 당해 뇌를 다쳐 기억을 잃었고, “넌 고담시 최고의 부자 토머스 웨인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일러준 엄마도 알고 보니 망상증 정신질환자였지요. 설상가상의 진수를 보여주는 망한 인생 탓에 악당으로 변해 간단 얘깁니다. 이를 거꾸로 뒤집으면, 이런 돌아버릴 것 같은 성장과정과 환경이 아니었다면 그는 조커가 되지 않았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질적으로 다른 놈이에요. 명실상부한 리얼 ‘미친놈’이지요. 이놈에겐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입가가 찢어진 이유를 설명할 때도 그 사연이 매번 달라지지요. 처음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 탓이라고 했다가, 나중엔 제 얼굴에 미소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벌인 일이라고 말하죠. 이놈은 자기가 터진 입으로 내뱉는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조차 분간 못합니다. 아니, 사실과 거짓의 개념 자체가 없는 놈이지요. 심지어 자기가 나쁜 짓을 하는 이유를 자기도 모릅니다. 은행을 털어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이놈은 돈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런 식겁할 말을 하죠. “돈은 안 중요해. 메시지가 중요하지.” 와우. 비전 없는 악당이 제일로 무서운 악당인 법이죠.

 세상에 가장 무서운 일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면서 “당신은 돈도 못 벌고 얼굴도 못 생겼고 배도 나오고 섹시하지도 않으니까”라고 이유를 댄다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우리 헤어져! 중국발 미세먼지를 더 이상 못 참겠어!”라고 미친 소릴 한다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잊지 마세요. 사연 있는 악당은 진짜 악당이 아닙니다. 연민과 공감을 유발하니까요.

 Q. ‘조커’를 보다가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습니다. 빈부 갈등의 계층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두 영화가 흡사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A. 탁월한 안목입니다. 공교롭게도 올해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 영화제는 ‘기생충’에, 베니스 영화제는 ‘조커’에 최고상을 줬다는 사실만 보아도 계급 갈등이 얼마나 글로벌한 이슈인지 짐작할 수 있겠네요. 여기서 재미난 점 하나 알려드릴까요? ‘다크 나이트’와 ‘기생충’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일도양단하는 기가 막힌 경계선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바로 두 영화의 키워드인 ‘계획(plan)’입니다. 세상은 근원적으론 부자와 빈자로 나뉘는 게 아니라, ‘계획이 있는 자’와 ‘계획이 없는 자’로 나뉜다는 세계관이지요. 아, 이게 무슨 속 터지는 소리냐고요?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이런 자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계획이란 걸 세울 놈으로 보여? 난 차를 쫓아가는 개랑 똑같아. 그냥 본능대로 행동하는 거지. 계획을 세우면 모사꾼에 불과해. 난 모사꾼이 아니야. 혼란의 사도일 뿐.” 이제 아시겠지요? 주류사회를 이루는 모든 시스템은 계획에 따라 움직이므로 역설적이게도 허점이 내재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지요. 자기처럼 계획 자체가 없는 놈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존재란 애깁니다.

  ‘기생충’의 송강호 가족도 마찬가지이지요.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야”라는 창의적 인생관으로 기신기신 살아온 송강호 일가의 모습은 가난할지언정 화목하고 행복했었습니다. 하지만 “온 가족이 부잣집에 침투해 기생충처럼 피 빨아 먹고 살자”는 ‘계획’이란 걸 아들이 난생처음 세우면서 가족의 운명엔 엇박자가 일어나고 파국을 맞지요. 아, 계획이란 주류사회의 전유물이자 작동 원리이거늘! “아들아, 넌 계획이 다 있구나” 하는 송강호의 명대사는 알고 보니 감탄이 아니라, 그들에게 닥쳐올 핏빛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지몽이었던 것이지요.

 독자님. 조커와 송강호가 말해줍니다. 요즘처럼 미쳐 돌아가는 세상은 계획 없이 사는 게 행복의 지름길이란 사실을. 무계획이 상팔자입니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