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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년전 노라의 선언보다 더 깊은 질문들... 답은 관객의 몫

139년전 노라의 선언보다 더 깊은 질문들... 답은 관객의 몫

Posted November. 13, 2018 07:36   

Updated November. 13, 2018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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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좁고 어두운 방 안. 아픈 남편을 위해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 몰래 돈을 빌린 사건을 고백하는 노라(정운선)의 독백으로 극은 시작된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1879년 발표했던 ‘인형의 집’에서 이 사건은 극 내내 주된 갈등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독백이 끝나자 무대가 넓어지고 천장이 높아지더니 위에서 거대한 달 같은 조명이 천천히 내려온다. 다섯 명의 배우는 둥근 조명 아래서 원시의 느낌이 물씬한 격정적인 춤을 춘다.

 입센 작품 중에서도 여성 해방과 성평등 문제를 환기시킨 것으로 유명한 ‘인형의 집’이 6일부터 최근 어느 때보다 젠더 이슈로 뜨거운 국내 무대에 올랐다. 줄거리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 간다. 주인공 노라는 남편을 요양시키려 몰래 급전을 얻었다. 하지만 건강을 되찾은 뒤 그 사실을 안 남편은 돌변한다. 자신이 남편의 ‘인형’일 뿐이었음을 깨달은 노라는 자신의 삶을 찾아 가족을 떠난다.

 하지만 강렬한 오프닝에서 보듯 이번 공연은 러시아 최고 권위의 연극상인 ‘황금마스크상’을 수상한 유리 부투소프(57)의 파격적인 연출이 두드러진다. 극의 진행은 원작을 따라가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전위적 변형이 가해졌다. 예컨대 원작에는 지문이 없지만 이번 무대는 랑크 박사(홍승균)가 극의 해설자처럼 지문을 읽어준다. 그는 “그, 그녀, 그게 뭐 중요한가요?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라는 대사를 반복적으로 던지며 추상적으로 재구성한 장면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한다.

 어둡고 텅 빈 무대에서 무대 장치와 조명, 소품도 의미심장하다. 천장 높이가 달라지고 위압적인 기둥이 내려왔다 올라가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등장인물들이 그 공간에 억눌려 있거나 갇혀 있다는 인상을 준다. 노라가 인형으로 장식된 병원용 침상이나 등장인물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앉는 책상, 헬메르가 얼굴과 머리를 씻는 얼음물 등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139년 전만 해도 가정을 버린 노라의 가출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파격적으로 와 닿지 않는 오늘날,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여성의 자기선언을 넘어 더 깊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부투소프 연출은 “후퇴와 진전을 반복하는 여성 문제뿐 아니라 이기심과 선택,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연극 ‘인형의 집’은 파격적인 재해석이 오히려 고전의 가장 충실한 번역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일깨운다. 2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3만∼7만 원. 02-580-1300


박선희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