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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화려함에 파스텔톤 도배…“체제선전 위한 거대 세트장”

장대-화려함에 파스텔톤 도배…“체제선전 위한 거대 세트장”

Posted June. 30, 2018 07:29   

Updated June. 30, 2018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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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두바이야, 플로리다야.”

 북한 평양 문수대 실내외 물놀이장을 찾은 영국 건축가 올리버 웨인라이트 씨는 입이 딱 벌어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털 천장, 인공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일어나는 물보라들, 형형색색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며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관람객들…. 그가 상상해 온 북한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계 어디 내놓아도 꿀릴 것 없는 관광대국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동화 같은 정경에 푹 빠져 있던 그를 확 깨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물놀이장 로비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마치 실물 같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밀랍 동상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부자의 동상이나 초상화가 걸려 있지 않은 건물은 없었다. 설사 건축물의 미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동상과 초상화는 언제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건축물은 경애하는 지도자의 은혜로 지어진 것이니 업적을 기리는 동상을 건물 정면에 두는 것은 북한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 ‘건축의 장인’ 김정은 

 영국 가디언과 더타임스에 건축담당 기고를 하는 웨인라이트 씨는 2015년 평양을 방문해 문수대 물놀이장을 비롯해 북한이 자랑하는 건축물들을 둘러봤다. 북한 패키지여행에 참가해 열흘 정도밖에는 평양에 머물지 못했지만 눈썰미가 좋은 그는 건축 전문가적 시각에서 200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의 북한 여행기와 사진들을 모은 책 ‘Inside North Korea(북한 내부에서)’가 22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출간됐다. 가디언 등에 게재된 저서 요약본에는 건축 전문가의 눈으로 본 북한 건축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흥미롭게 담겨 있다.

 웨인라이트 씨가 본 평양은 포클레인 지게차 등이 하루 종일 오가며 동시다발적으로 건설 공사가 진행되는 곳이었다. 이방인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러운 건설 붐은 김정은 집권 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평해튼(평양+맨해튼)’으로 불리는 여명거리 초고층 아파트단지를 비롯해 문수대 물놀이장, 미래과학자거리 등 수많은 건축물이 새로 지어지거나 개축됐다.

 북-미 정상회담 이전 외국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미지가 핵 위협을 일삼는 무분별한 지도자였지만 북한 주민들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 김정은은 일종의 ‘건설 장인(master builder)’으로 통했다. 새롭게 생겨나는 북한 중산층의 욕구가 뭔지 알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현대적 건물과 시설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 ‘수호신(champion)’과 같은 존재였다.

 웨인라이트 씨와 동행했던 북한 현지 가이드는 요즘 북한에서는 ‘평양 속도전’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과거 김일성 시대에 ‘천리마 속도전’이 있었다면 지금은 평양에서 빨리빨리 건물들을 짓도록 지도부가 속도전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2014년 평양 평천구역 23층 아파트 단지 붕괴 사고 같은 부실공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 옛 소련과 파스텔 컬러

 웨인라이트 씨가 주목한 북한 건축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북한은 옛 소련 건축의 영향으로 무슨 건물이든 화려하고 장대하게 짓는 것이 특징이다. 상당수 북한 건축가는 과거 소련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소련식 건축에 익숙했다. 1989년 소련의 건축기술을 접목해 세운 능라도 5·1경기장은 수용인원 15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장이라고 북한은 선전한다.

 북한은 크게만 짓는 것이 아니라 고전주의적 기교를 통해 건물의 미적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다. 소련의 네오클래식 건축양식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사례가 평양의 지하철역이다. 평양 지하철역 중 가장 큰 영광역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천장을 자랑한다. 세밀하게 조각된 석조 기둥이 물결치듯 천장을 받치고 있으며 한가운데에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다. 

 북한은 자신들의 건축이 단순히 소련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주적 주체사상의 결과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1950년대 김일성은 평양을 가리켜 “주체 건축의 위대한 정원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평양 지하철역의 석조 기둥은 단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한 김일성의 투쟁과 북한 인민들의 자유와 번영을 향한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북한 당국은 설명한다.

 북한 건축의 또 다른 특징은 파스텔 색상의 과도한 사용이다. 소련식 건축이 김일성-김정일 2대에 유행했다면 26세에 집권한 젊은 리더 김정은 시대의 건축은 아기자기한 외형에 파스텔색을 주로 사용한다. 겨자색, 연어색, 분홍색, 연녹색 같은 파스텔톤은 서구 건축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지만 평양에 가면 건물 외벽이든 내부 벽지이든 흔히 볼 수 있다. 2015년 김정은이 “멋쟁이 아동궁전”이라고 칭찬해 화제가 됐던 강원도 원산 고아원 신축 건물은 내부는 온통 연노랑이며 외관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다.

  ‘행복감을 유발하는 파스텔색으로 치장한 건축물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웨인라이트 씨는 “김정은 정권의 의도가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파스텔의 낙천적이고 모더니즘적인 분위기를 통해 김정은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걱정거리 없는 북한’ ‘번영 일로의 북한’이라는 설명이다. 웨인라이트 씨는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북한(김정은)은 국민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으며, 국민을 어린이화(化)시키는 강력한 마취제 도구로 건축이 이용되고 있다.” 

○ 화려하지만 텅 빈 건축물들

 북-미 정상회담 후 ‘절친’ 사이로 거듭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건축물에서도 유사점이 있다. 유리거울 외관으로 치장한 뉴욕 트럼프타워나 손잡이까지 대리석으로 장식한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 별장은 평양 여명거리 초호화 아파트나 47층짜리 양각도 호텔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웨인라이트 씨는 이를 ‘독재자 패션(dictator chic)’이라고 비꼬았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는 호사스러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김정은 건축물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북한이 자랑하는 건축물은 화려하게 꾸며 놓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용자가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 중산층이 빠른 속도로 생겨나고는 있지만 물놀이장, 스키장, 수족관 등을 즐길 만큼 아직 소비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건축물들을 둘러본 웨인라이트 씨는 “(사람이 살지 않는) 연극 세트장 같다”고 비유했다. 그리고 연극의 무대가 바로 평양인 것이다. 북한 가이드조차 “텅 빈 건물에 외국 관광객들이 들어와 볼 이유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웨인라이트 씨는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북한의 현실을 봤다. 평양을 조금만 벗어나자 허물어진 집들과 여기저기 구멍 뚫린 고속도로, 누렇게 녹슨 철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수대 물놀이장이 아니라 이런 곳들이 진짜 북한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건축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정미경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