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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전쟁 생생한 고발…현장에 미쳤던 사진 거장

참혹한 전쟁 생생한 고발…현장에 미쳤던 사진 거장

Posted June. 25, 2018 08:34   

Updated June. 25, 201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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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로버트 캐파(본명 안드레 프리드만·1913∼1954·사진)는 전설적인 사진기자다.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라며 콘탁스 카메라 한 대만 들고 전쟁터를 누볐다.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데는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병사들을 담은 사진 11장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순간을 기록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덩케르크’ 등 전쟁영화를 제작하는 데 영감을 주기도 했다.

 베를린 정치대에 입학한 그는 헝가리 경제가 붕괴해 가족의 지원이 끊기자 데포 통신사에서 암실 보조로 일하며 사진을 처음 접했다. 소련에서 스탈린과 대립하다 추방된 레온 트로츠키가 1932년 코펜하겐에서 첫 대중 연설을 하는 장면을 찍으며 사진기자로 데뷔했다. 이후 파리에서 독일 출신 유대인 여성 게르타 포호릴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자 1936년 그는 로버트 캐파로, 포호릴레는 게르다 타로로 개명한다. 둘은 ‘로버트 캐파’라는 미국 사진작가를 만들어내 사진 가격을 3배나 올리며 재미를 본다.

 캐파의 명성을 높인 건 스페인 내전(1936∼1939)이었다. 캐파와 타로는 마드리드, 세고비아 등에서 현장감 넘치는 사진을 전송했다. 특히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에서 한 병사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포착해 스타가 됐다. 하지만 1937년 타로가 탱크에 치여 숨지자 캐파는 충격에 빠진다. 표지에 대표작 ‘총 맞는 군인’ 사진을 넣은 책 ‘진행 중인 죽음’(1938년)을 고인에게 헌정했다.

 슬픔을 잊기 위해 그는 다시 전쟁터로 떠난다. 중일전쟁(1938년)이 벌어지던 중국에서 약 7개월간 취재했다. 캐파는 전쟁의 긴장 속에서 술, 여자, 도박을 탐닉했다. 런던 공습을 견딘 노동자들을 담은 책 ‘워털루가의 전투’(1941년)를 작업하며 유부녀 핑키와 사귄다. ‘그때 캐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1947년)는 뉴욕에서 서류상 결혼으로 미국인이 된 그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쓴 회고록이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실직한 캐파는 할리우드의 최고 스타 잉그리드 버그먼을 파리에서 만난다. 치과의사 남편에 딸까지 있었던 스웨덴 여배우는 13세 때 작고한 보헤미안 사진가 아버지를 닮은 캐파의 유혹에 넘어간다. 둘은 2년간 뜨겁게 연애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캐파는 1947년 동료들과 매그넘 통신사를 창설하고 중동전쟁(1948∼1950년) 취재를 위해 이스라엘을 찾았다. 인도차이나 전쟁 막바지였던 1954년 ‘라이프’지의 베트남 특파원으로 파견돼 5월 25일 프랑스군이 홍강 삼각주의 요새를 철거하는 작전을 취재한다. 수풀 사이로 진군하는 프랑스군을 찍기 위해 멈춰 선 순간 그는 지뢰를 밟고 산화했다. 베트남에서 전쟁 중 숨진 첫 미국인 기자였다.

 매그넘 창립 동지였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 에세이 ‘영혼의 시선’에서 캐파를 이렇게 추억했다. ‘그는 소용돌이 속에서 고결하게 싸웠다. 운명의 여신은 그가 영광의 절정에서 쓰러지길 원했다.’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손효림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