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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출범전 상하이서 국내조직과 연계...독립운동 모의단계부터 개입

임정, 출범전 상하이서 국내조직과 연계...독립운동 모의단계부터 개입

Posted May. 05, 2018 07:56   

Updated May. 05, 2018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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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서울) 북촌의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수목이 울창한 삼청동 산비탈에 자리 잡은 2층 규모 붉은 벽돌집 학교는 장안의 명물로 부상했다. 1917년 11월 오로지 민족 자본만으로, 그리고 선생과 학생들이 직접 터를 닦고 돌을 나르는 등 한민족의 열정과 땀으로 완공한 새 교사(校舍)였다.(‘매일신보’ 1917년 12월 4일자)

 학교 설립자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직접 고른 터였다. 뒤로는 북악산의 정기를 받고 앞으로는 경성 장안을 한눈에 굽어보면서 학생들의 호연지기를 기르려는 인촌의 의지가 실린 명당이었다.

 선생과 학생은 모두 머리를 짧게 깎았다. 300명의 학생들은 해군장교 복장과 유사한 교복과 검은 천을 두른 교모를 착용했다. 일제에 대한 항거의 인상을 진하게 풍기는 두발과 제복이었다. 민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중앙학교가 유명해지자 일본 관리들 사이에 “누가 중앙학교를 허가해 주었느냐”며 책임 문제가 불거질 정도였다.(‘고하 송진우 전기’)

 교사들의 진용 또한 화려했다.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당대의 대가들, 김성수 송진우 최두선 이강현 현상윤 나경석 등 일본 유학을 한 쟁쟁한 실력파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설립자 인촌은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치는 평교사로 근무했고, 교장인 고하 송진우(1890∼1945)는 자신의 월급보다 더 후하게 교사들을 대우했다. 조선인 사회가 인촌과 중앙학교에 대해 기대를 크게 가질수록 일제 총독부의 감시와 경계는 강화됐다.(‘인촌 김성수전’) 

 사실 중앙학교는 교육광복(敎育光復), 민족갱생(民族更生)의 요람답게 민족 운동가들을 배출하는 양성소이자, 배일(排日) 독립의지를 키우는 근원지였다. 일제에 대한 테러로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김두봉,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중앙학교 출신이었다.(‘중앙백년사’) 또 중앙학교 학생들은 3·1운동이 전개되자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때 일제에 검거돼 체형을 받은 중앙학교 학생들만도 확인된 범위에서 30여 명으로 알려졌을 정도다.(‘인촌 김성수전’)

○ 중앙학교 숙직실, 국내-해외 연결 거점으로

 1919년 1월, 겨울의 삭풍 속에서도 ‘북촌의 명소’로 자리 잡은 중앙학교 교정은 미묘한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중앙학교를 찾아온 이후부터는 3·1운동을 모의하는 책원본부(策源本部)로 변신한 것이다.

 교실 앞 운동장 동남쪽에 자리한 중앙학교 숙직실(당시 교장 사택으로 활용)은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져 있곤 했다. 설립자 인촌과 교장 고하, 교사인 기당 현상윤(1893∼?)이 함께 생활하며 민족의 미래를 설계했다. 또 외부에서 찾아온 지사들은 학생들이 바깥에서 일본 밀정의 미행을 감시하는 동안, 중앙학교 팀들과 함께 은밀하고도 활발히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인촌과 고하는 인근 김사용의 집(계동 130번지)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자연스럽게 인촌의 서울 거처 또한 식사를 빙자한 독립운동 회합 장소가 됐다. 해외 유학파들과 국내 지사들은 서울에 오면 으레 중앙학교와 인촌의 거처를 방문하곤 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여운홍(여운형의 동생)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독립청원 백만인 서명’을 받아오라는 밀명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뒤 곧장 찾은 곳도 인촌의 거처였다.(이경남, ‘설산 장덕수’). 여운홍 역시 중앙학교 출신이었다.

 이처럼 북촌은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국내와 해외를 연결하는 거점이 됐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등 중앙학교 팀은 국내 독립운동은 그 성격상 어느 한두 개 종파나 단체의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내의 주된 민족세력이 모두 단결하여 거사를 하고, 국외에서 이에 성원을 보내는 활동이 가장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하 송진우 전기’)

 이들은 먼저 천도교에 손을 내밀기로 했다. 송계백이 들고 온 2·8독립선언서(초안)를 설득용 ‘무기’로 활용했다. 현상윤은 송계백을 데리고 최린(1878∼1958)을 찾아갔다. 천도교 산하 교육기관인 보성학교 교장 최린은 현상윤과 송계백의 보성학교 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최린은 송계백이 내민 독립선언서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 천도교 수장 손병희(1861∼1922)에게 즉각 보고했다. 손병희는 일찌감치 이종일이 이끄는 천도구국단 등에 의한 정보망과 단결된 조직력으로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참이었다. 손병희는 이 선언서를 접하고서는 국내외 세력과 연대를 통해 민족적 거사를 벌이기로 최종 결심했다.

 손병희의 동참 발언을 확인한 송진우와 현상윤 등은 즉각 최린의 집 내실에 모여 축배를 겸한 비밀회합을 가졌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의견을 대리하는 최린은 중앙학교 팀들과 함께 독립운동 거사의 주역으로 동참했다. 

 이들은 밤 깊도록 독립운동의 실행에 대해 구체적 계획과 방법을 논의했다. 우선 민족대표자 명의로 조선독립을 선언한 후, 그 선언서를 인쇄해 전국에 배포하고, 국민이 총동원된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해 조선민족의 독립 열망을 내외에 알리는 순서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론지었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공교롭게도 최린과 손병희 또한 모두 북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최린은 재동 68번지(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살고 있었고, 손병희는 가회동 170번지(현재 북촌박물관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이 운영하던 유심사(계동 43번지) 또한 북촌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래저래 조선조 이래 양반 집권층이 모여 살던 북촌은 3·1독립운동의 최전선 기지가 되었다.

○ 이광수의 문장에 자극받은 최남선

 2·8독립선언서는 당대의 대문장가로 유명한 최남선(1890∼1957)의 동참까지 이끌어냈다. 당시 신문관(을지로2가 21번지)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최남선은 18세에 한국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문인으로 도쿄 유학생 출신인 이광수,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東京三才)’로 불렸다. 또 국내외 독립선언운동에 직접 관여했던 세 사람은 이후 ‘동아일보’에 몸담았던 기연과 함께 ‘조선삼재(朝鮮三才)’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 인촌과 고하는 일찌감치 이들 삼재를 눈여겨봐 왔다.

 송진우와 현상윤은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 이전부터 최남선을 끌어들여 독립운동을 함께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토록 공을 들였음에도 최남선은 “나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오” 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송진우가 내민 회심의 카드가 바로 2·8독립선언서였다. 송진우가 때마침 중앙학교를 찾아온 최남선에게 선언서를 들이밀었다. 최남선은 도쿄 후배들의 거사 계획과 독립선언서를 보고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최남선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선언서를 읽는 손까지 떨었다. 게다가 이광수가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흥분한 목소리로 국내에 사용할 독립선언서는 자신이 직접 작성하겠다고까지 다짐했다.(‘고하 송진우 전기’)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 일본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 그리고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열국 위원들에게 보내는 서한까지 도맡아 집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선언서를 맡기는 쪽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선언서가 발각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남선은 한 해 전인 1918년 9월 천도교 측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집필을 의뢰받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묵암비망록’)

 당시 일제의 요시찰 대상인 최남선은 자신의 집인 삼각정(중구 삼각동) 대신 초음정(初音町·현재 을지로5가 오장동) 근처 한 일본 여성(小澤) 집의 학생 공부방을 3주간 빌려 비밀리에 글을 짓고 있었다. 어느 날, 현상윤이 선언문 작성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러 최남선이 머무는 일인(日人) 집을 찾았다. 최남선이 집에 없다고 하기에 그대로 돌아 나오려는데, 일본 여성이 말했다.(이하 현상윤의 회고, 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현 선생님이 무엇 때문에 여기를 왔는지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현상윤은 순간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알기는 무얼 아오? 나는 최 선생을 좀 만나보러 왔을 뿐이오”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녀는 크게 웃으면서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와서 보고 가시지요” 하고 방으로 들어오기를 권했다. 일본 여성의 강권에 방에 들어간 현상윤은 기절초풍했다. 그녀가 자기 옷깃에서 독립선언서를 주섬주섬 꺼내 보여주는 것 아닌가. 현상윤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선언서를 읽고 있는 동안 그녀는 아들(일본인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21세 청년)까지 부르더니 그의 옷깃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통고서를 꺼내서는 또 보여주었다.

 사실 일본 여성은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최남선과 함께 귀국한 임규(1867∼1948)의 부인이었다. 당시 임규는 중앙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최남선이 경영하던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고전적 간행 일을 맡고 있었다. 3·1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등을 일본어로 주석·번역한 후 일본에 건너가 일본 내각과 중의원, 귀족원 등에 우편으로 통고한 인물이기도 하다.  

 뒤에 현상윤이 위험천만한 일을 벌인 최남선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최남선은 “우리 집이나 조선 사람에게 맡겨두는 것보다는 일인에게 맡겨두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답했다. 그럴듯한 비밀 조치이기는 했으나, 현상윤은 3·1운동이 일어나는 그날 그 순간까지 외나무다리를 타는 듯한 아슬아슬한 마음을 놓지 못했다. 현상윤은 “기미독립운동은 참말 천우신조였다”고도 회고했다.


안영배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