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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세제시절 비밀편지...“받는 즉시 불사르길”

영조 세제시절 비밀편지...“받는 즉시 불사르길”

Posted October. 16, 2017 07:48   

Updated October. 16, 201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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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는 즉시 불사르십시오(卽付丙丁).”

 조선 영조(1694∼1776·그림)가 왕세제(王世弟) 시절 보낸 비밀 어찰(御札)이 최근 확인됐다. 수신자는 경종 비 선의왕후의 아버지 어유구(魚有龜·1675∼1740)다.

 어유구의 8대 후손인 어환 성균관대 의대 교수는 가문 대대로 보관하던 어찰들의 내용을 확인하고 동아일보에 사진을 공개했다. 발견된 편지는 모두 4편으로 이 중 2편은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가 1724년(경종 4년) 쓴 친필일 가능성도 높다. 나머지 2편은 후대 인물인 홍직필이 문집 ‘매산집’에 전체 또는 일부를 베껴놓았다.

 “소자(小子·영조)의 이 한 몸을 전적으로 경(어유구)에게 의탁합니다.”

 영조가 어찰에 쓴 표현이다. 이는 ‘미래 권력’이지만 지위가 위태로운 세제 영조와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어유구 사이의 ‘핫라인’을 보여준다. 세제 시절 영조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했다. 노론은 경종을 압박해 동생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고, 나아가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지만 소론으로부터 역공을 당했다. 그 결과 노론 대신 4명을 포함해 약 60명이 목숨을 잃고 170여 명이 유배 등에 처해지는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났다. 영조를 지원하던 노론 세력이 거의 ‘싹쓸이’를 당한 것이다. 심지어 영조 자신도 ‘경종을 암살하려는 역적과 접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영·정조 시기 정치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성환 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은 어찰 내용을 본 뒤 “노론 신하들이 참혹히 살해되자 극도로 근신하던 영조가 왕후와 국구 어유구를 최대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 드러난다”라고 말했다.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어유구와 선의왕후는 애초 영조가 아니라 ‘종친의 아들로 나이 어린 자’를 세자로 세우려 했기에 왕세제 및 노론 주류와 불편한 관계였다”며 “하지만 영조와 어유구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관계를 수습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영조는 어찰에서 어유구에게 ‘모종의 행동’을 독촉하기도 했다.

 “국구의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좋은 방책을 말한다면, 일이 나의 몸에 관련돼 있으니 어찌 감히 입으로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국구께서 깊이 헤아려 충분히 알고 계실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 공께서 만약 나라를 위해 종묘사직을 부지하려면 잘 아뢰어 처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조선 후기 사상·정치사 연구자인 이경구 한림대 한림과학원 교수도 “어유구가 무언가 세제와 관련된 어려움을 알렸고, 왕세제는 이에 대해 어떤 처리나 결단을 촉구하는 입장이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이 어찰을 통해 영·정조 시기 정치사의 미스터리 하나가 풀렸다는 평가다. 신임옥사로 사형당한 노론 4대신의 후예들은 노론의 핵심 중 하나인 어유구가 경종 대에 과격파 소론과 결탁한 듯한 행적이 있다며 지속적으로 문제를 삼았다. 그때마다 영조가 어유구를 옹호한 이유를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경구 교수는 “왕세제의 과감한 편지는 이례적인 것”이라며 “성년이 되고 나서 갑자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영조의 정치력이 잘 드러난다”라고 평가했다.



조종엽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