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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과 사약

Posted June. 30, 2017 07:29   

Updated June. 30, 2017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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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선비정신이나 일본의 에도시대 사무라이 정신은 모두 성리학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선비라면 사약(賜藥)을 받을 용기, 사무라이라면 할복할 용기가 필요했다. 임금이 거슬리는 선비를 그래도 선비로서 대우해서 처형하는 방법이 사약이었다. 사약은 형정(刑政)에 없는 형벌이었다. 평범한 농부가 사약을 받는 일은 없었다. 사무라이라면 사약 대신 할복을 요구받았을 것이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로 받고 있는 재판에서 그제 “재판할 것도 없이 독배를 내리면 깨끗이 마시고 이 상황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혐의를 인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제가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구속까지 됐는데, 잘 보좌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는 점에서 정치적 책임을 통감한다”며 “과거 왕조시대 같으면 망한 왕조에서 도승지를 했으니 사약을 받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유죄든 무죄든 빨리 재판을 끝내고 싶다는 심정의 표현으로도 들린다.

 ▷그는 옥사(獄死)하지 않고 밖에 나가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다. 블랙리스트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15년 의원 시절 처음 제기한 것이지만 특검이 손대기 전까지만 해도 비판할 실정(失政)이었지 처벌할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다. 78세 노인이 혈관에 스텐트를 박았건 말건 감옥에 가두고 법정으로 끌고 다니며 죄를 추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네 죄를 네가 알렷다’며 사약을 내리던 과거가 더 인간적이지 않나 싶다.

 ▷김 전 실장도 블랙리스트를 부인만 하는 건 당당해 보이지 않는다. 법 미꾸라지 소리를 들어서야 선비에게나 내리는 사약을 운운할 수 있겠나. 그는 아들이 사고로 뇌사에 빠진 상황에서도 자리에서 물러나지 못했다. 남아 달라고 부탁을 한 쪽도 부탁을 들어준 쪽도 비인간적 느낌이 들지만 비인간적일 정도로 사(私)보다는 공(公)을 우선한 것은 틀림없다. 블랙리스트도 사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공을 추구했으나 그 방식이 잘못됐다. 블랙리스트만이겠는가. 대통령에게 충언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책임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