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평양의 영어선생님

Posted April. 26, 2017 07:28   

Updated April. 26, 2017 07:29

中文

  ‘현금을 가져가라. ATM이나 신용카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뜨고 기도하라. 종교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 ‘캠퍼스는 밤에 불을 켜지 않고 전기가 때때로 끊기므로 플래시는 하나 이상, 배터리는 많이 가져가라.’ 북한 평양과학기술대가 개교한 이듬해인 2011년 한 교수가 정리한 행동요령이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돈을 모아 건립했고 영어로만 강의하는 일류 대학에서 따라야 할 규칙이라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힘들다.

 ▷이 수칙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수키 김이 쓴 ‘평양의 영어선생님’(영어판 제목 ‘Without you, there is no us’)에 나온다. 수키 김은 영어 교수로 6개월간 지낸 경험을 ‘잠입 저널리즘’ 형식의 책으로 펴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이 대학을 둘러싼 유·무형의 제약은 크게 나아졌을 것 같지 않다. 수키 김은 ‘평양에서 사는 것은 어항 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며 내내 극도의 긴장감을 느꼈다고 했다. 유서를 써놓고 왔다는 외국인 교수도 책에 등장한다.

 ▷항공모함과 핵추진 잠수함까지 동원한 미국의 고강도 압박에 북한이 평양과기대 교수 80여 명을 인질로 삼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이미 이 대학에서 강의했던 토니 김 전 연변과기대 교수가 체포됐다. 한국계 및 외국인 교수들은 힘들고 낯선 환경에서도 동포애와 신앙심에 의지해 정보통신 농생명 금융경영 분야의 전문가들을 길러내고 있다. 만약 이런 교수들을 방패막이로 삼는다면 북한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비난 앞에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수키 김 책에는 한국계 뉴질랜드인 여교수가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하는 방법을 가르치려다 실패하는 대목이 나온다. 학생들은 영어만 배우면 됐지, 서양 식사법은 필요 없다고 거부한다. 이 교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만 내놓고 이쪽으로는 건너오지 말라”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북한은 지도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엘리트 학생들까지 온 세상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식이라면 북한이 스스로 불러들인 고립에서 헤어날 시점은 까마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