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만리장정

Posted March. 02, 2017 07:12   

Updated March. 02, 2017 07:23

中文

 “하늘에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총알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기차에서 내려 밭까지 뛰어가 몸을 숨겼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잔 다르크’로 불렸던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장강일기(長江日記)’에 나오는 구절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이 탄 열차가 중국 광저우 인근에서 일본군 공습을 받자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모습을 회상했다. 정정화는 홀로 지내는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은 안살림꾼이기도 했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임정이 수립된 것은 거족적인 3·1운동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초기의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가라앉았고 국내외 동포들의 관심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김구가 주도하고 윤봉길이 실행한 1932년 훙커우 의거는 임정이 활력을 되찾는 반전의 계기였다. 하지만 보복에 나선 일제의 탄압으로 임정은 13년간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외교부가 광저우에서 79년 만에 발견한 임정 청사는 1938년에 2개월 정도 사용했던 곳이다. 정정화가 묘사한 일본군 공습은 이곳을 급하게 떠나던 길에 일어났다. 광저우에 오기까지 임정은 항저우, 전장, 창사를 차례로 떠돌았다. 광저우 이후에도 1939년까지 류저우, 치장으로 피신해야 했다. 1940년 충칭에 와서야 본격적인 대일 항전체제를 갖췄다. 8년간 1만3000리(약 5100km)를 헤쳐나간 이 행로를 임정 사람들은 만리장정(萬里長征)이라고 불렀다.

 ▷창사 시절에는 남목청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이곳에서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의 통합회의가 열렸다. 불만을 품은 한 조선혁명당원이 권총을 쏴 김구가 사경을 헤맸고 한 명은 끝내 숨졌다. 이런 어려움에도 임정은 통합과 좌우 합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요 요인들은 피란길에도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걱정했다고 한다. 어제 서울 광화문은 탄핵 찬반으로 갈라진 두 진영이 외치는 함성으로 98주년 3·1절이 무색했다. 오직 3·1정신으로 목숨 건 풍찬노숙을 견뎌낸 선구자들이 후손들의 분열된 모습에 고개를 돌릴까 두렵다.



李镇 leej@donga.com